노태우정부 출범 직후인 1988년 4월 제13대 총선이 열렸다. 한 달 뒤 국회 개원식에서 김재순 국회의장은 이렇게 연설했다. “이번 정당별 의석 분포는 두려움을 느낄 만큼 신비롭습니다. 4당 병립(竝立)의 새로운 정치 판도는 국민 전체가, 각계각층이 아무도 소외되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정치사에 대화와 타협의 전통을 확고하게 세울 수 있는 황금분할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유권자들은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줬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 세 야당이 164석(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을 얻었다. 여당은 국정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게 됐고 야당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소수여당을 견제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 비율이 아주 절묘해 ‘황금분할’이라 한 것이다. 이후 여러 선거에서 황금분할이 등장했다.
2004년 17대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와중에 치러졌다. 거센 탄핵 역풍에 열린우리당이 200석까지 확보하리라 예상됐지만 결과는 반을 겨우 넘긴 152석이었다. 한나라당은 121석,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었다. 당시 고건 대통령권한대행은 “국민은 여당이 안정적 국정운영을 하도록 아슬아슬한 과반을 주고 견제세력(한나라당)에 견제할 힘을 줬으며 민노당은 거리투쟁 대신 의회에서 말할 수 있게 해줬다. 결과적으로 황금분할이 됐다”고 평가했다.
2008년 18대 총선이 끝나자 한 신문은 ‘절묘한 황금분할 민심은 섬뜩했다’는 제목을 달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압승 직후여서 한나라당이 168∼178석 ‘안정 과반’을 얻으리라 예상됐지만 4년 전 열린우리당처럼 ‘턱걸이 과반’(153석)에 그쳤다. 통합민주당은 81석, 한나라당 친이(親李)계에 밀려 탈당한 친박(親朴) 후보들이 26석을 확보했다. 한나라당 153석 중에도 32석은 친박계였다. 이 대통령에게 국정운영 동력을 주면서도 친이계가 독주하지 못하게 견제세력을 남겨둔 것이다.
이렇게 신비롭고, 절묘하고, 또 섬뜩하다는 황금분할이 6·4지방선거에서도 재현됐다. 광역단체장을 여당이 8곳, 야당이 9곳 차지했다. 야당은 서울에서 압승했지만 경기와 인천을 내줬고 여당은 부산을 지켰지만 충청에서 완패했다. 정치권에선 ‘무승부’란 말이 나왔다.
이런 황금분할은 누가 기획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천만 유권자의 개인적 판단이 모여 만들어지는 ‘우연한’ 그림이다. 거기에서 어떤 메시지가 유추되기에 이를 민심(民心)이라 부른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몇 해 전 칼럼에서 이 민심을 정신과 환자의 무의식에 빗대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은 ‘환자는 항상 옳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환자의 엉뚱하고 비논리적인 말과 행동도 무의식 수준에서는 그 사람의 핵심 동기를 드러내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 민심이란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무의식이 투사된 개념이다. 따라서 국민의 무의식, 즉 민심은 항상 옳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무의식은 왜 이렇게 자주 황금분할을 그려내는 걸까. 리서치앤리서치 배종찬 본부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나라 유권자의 보수·진보 비율은 51대 49, 대충 절반씩이다. 이 사람들이 평소 갖고 있던 생각대로 투표하면 여야가 비슷하게 표를 얻는 그림이 나온다. 유권자가 평소 생각을 벗어나 투표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력이다. 2010년 지방선거는 무상급식 이슈가 그렇게 했다. 황금분할 구도는 유권자의 마음을 확 끌어당긴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한국 선거판은 이놈도 저놈도 마뜩지 않을 때가 많다는 얘기다.
태원준 사회부 차장 wjtae@kmib.co.kr
[뉴스룸에서-태원준] 황금분할
입력 2014-06-09 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