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딸 같은 이들 밤길 안전 위해 월급 적어도 매일 밤 나선다

입력 2014-06-07 06:13 수정 2014-06-07 20:30

"밤길 무서우시죠? 집에 갈 때 전화하세요." 지난 3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출구 앞에서 색다른 '호객행위'가 펼쳐졌다. 노란 조끼와 모자를 걸친 동대문구 여성안심귀가 도우미 정영숙(53·여)씨가 역에서 나오는 20대 여성에게 전단지를 건넸지만 여성은 손사래를 치며 지나갔다. 정씨가 "돈 드는 게 아닌데…"라며 멋쩍게 웃었다. 서울시가 '여성안심귀가 스카우트' 서비스를 시작한 지 1년이 됐다. 2인1조 귀가 도우미가 월∼금 오후 10시부터 새벽 1시 사이 젊은 여성들을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에서 집앞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다. 대학에 입학해 상경한 신입생부터 영어공부에 한창인 취업준비생까지 이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이 지난해에만 2만2675명이다.

◇“불안한 밤길 동행 고마워”=같은 날 오후 10시 서울 지하철 1호선 구로역 앞. 구로구 귀가 도우미 유금자(55·여)씨가 신청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뒷짐 진 손에는 반짝이는 경광봉이 들려 있었다. 술에 살짝 취한 신모(27·여)씨가 힘겹게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왔다. 이날 첫 ‘고객’이다.

신씨는 “회식 때문에 늦었다”며 “남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항상 불안에 떤다”고 했다. 유씨와 함께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신씨의 어머니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도우미가 계셔도 불안한 게 어미 마음이잖아요.” 어머니는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11시쯤 구로구 천왕역에서 삼미연립아파트로 간다는 김모(31·여)씨의 신청이 들어왔다. “아, 나 그분 알아!” 김씨와 안면이 있다는 김팔순(59·여)씨가 나섰다. 김씨 집으로 가는 길은 내내 좁은 골목이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설치돼 있었지만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을 식별하기도 어려웠다. 교복 입은 학생 4명이 담배를 피우며 김씨를 흘낏 쳐다봤다. 김씨의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는 “늦은 저녁에는 죄송해서 부모님을 부르기도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인근 개봉역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김모(24·여)씨는 매일 자정에야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다. 좁고 외진 골목을 혼자 걷는 게 매번 서러웠던 차에 안심귀가 서비스를 알게 됐다. 그는 “부모님도 저녁 늦게까지 일하셔서 데리러 올 사람이 없었는데 이모 같은 도우미분들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며 활짝 웃었다.

관악구 귀가 도우미 최경숙(41·여)씨는 출근 첫날 지방에서 막 상경한 대학 1학년 여학생을 자취방까지 데려다 준 적이 있다. “얼굴이 하얗고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시골에 있는 어머니가 걱정이 돼서 인터넷으로 직접 신청을 해줬대. 이후 사흘간 매일 집에 같이 갔는데 어느 날부터 소식이 없어. 그런데 우연히 보니까 남자친구가 바래다주더라고.” 동료 도우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비스는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30분 전 다산콜센터(120)로 전화하면 이용할 수 있다. 원하는 장소에서 노란 유니폼의 귀가 도우미를 만나 신분증으로 본인 확인만 하면 된다.

◇딸 같은 아이 밤길 안전 지키지만 여건은 열악=귀가 도우미들은 동네 순찰대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같은 날 자정쯤 서울 청량리역 대합실. 20대 여성이 만취한 채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구토하고 있었다. 토사물이 바닥에 흩뿌려져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역사를 돌던 귀가 도우미 김동숙(53·여) 임경자(56·여)씨가 후다닥 달려가 주머니에서 꺼낸 휴지로 토사물을 닦기 시작했다. 지하철 막차가 곧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임씨가 여성에게 “나 비상금 가져온 거 있어. 이거 줄 테니 택시 타고 가”라며 1만원짜리 한 장을 쥐어줬다. 임씨는 “이건 도우미의 역할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을 보고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다”고 했다.

1년 계약직인 귀가 도우미들은 월급 66만원을 받는다. 보통 낮에는 동네 슈퍼 계산원 등 다른 일을 하다 밤이 되면 경광봉을 쥐는 ‘투잡족’이다. 박봉에 매일 밤 찬 공기를 맞으며 돌아다니는 게 쉽지는 않지만 딸 같은 이들의 밤길 안전을 위해 나선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도우미는 “경광봉 건전지를 하루 3시간씩만 켜도 일주일을 못 버티고 귀가 여성들과 휴대전화 통화도 많이 해야 해서 비용이 적잖이 든다”고 했다. 이런 비용은 아직 지원되지 않는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