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국가’ 대한민국②] “하루에 수억 잃었지만… 발을 끊기가 쉽지않아” 한숨

입력 2014-06-09 04:26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경마 장외발매소를 찾은 사람들이 건물 1층에 설치된 22개의 모니터를 통해 경마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퀵서비스 배달원, 회사원, 자영업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이들의 입에선 환호보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실제 말이 달리는 장면을 감상할 수 있는 야외 경마장과 달리 전국 30곳 장외발매소는 화면을 보며 베팅하는 데만 집중하기 때문에 ‘화상 도박장’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병주 기자
한국마사회 강남지점 장외발매소 외부에서 마권 잡지를 탐독하고 있는 이용객들. 이병주 기자
블라인드 사이로 객장 내부를 들여다보는 이들. 이병주 기자
매대에 전시된 마권 잡지들. 이병주 기자
“어, 어, 3번, 3번, 간다, 간다. 어? 7번 가면 안돼. 7번, 7번, 7번 가네. 에이, ××.”

금요일인 지난 6일 오후 대전 월평중로에 있는 한국마사회의 마권 장외발매소.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로 관람의자 위에 앉은 5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 정면 대형스크린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화면 속에서는 날렵한 경주마들이 시원스레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옆자리 마권잡지를 보니 3번 말 이름 위에 야무지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3번 말은 이 마권잡지가 예측한 ‘고(高)배당마’였다. 3번 선행(1등)에 걸었는데 2등을 했으니 ‘꽝’이 됐다.

뜻밖에 아주머니는 ‘쿨’했다. “아, ××. 오늘 운 드럽네.” 욕 한 번 더 하더니 ‘12만원’ ‘6만1000원’이 찍힌 마권 영수증을 바닥에 던지고 다시 마권잡지 탐독에 들어갔다. 장외발매소에서는 서울·제주·부산경남 등지의 경마장에서 열리는 10여차례 경주가 중계된다. 대략 30분 단위다. 옆 자리 50대 남자가 말했다. “공부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김삼순(가명)씨가 대전의 마권 장외발매소를 드나든 건 3년쯤 됐다. 불황에 가게 문 닫는 날이 많아지면서 남편과 재미로 시작했다. 실제 달리는 말을 본 적은 없다. 화면 보고 숫자 골라 베팅하는, 말 그대로 ‘화상도박’이다. 지금은 일주일에 사흘을 여기서 산다. 발매소가 매주 사흘 열리니 ‘전출’인 셈이다. 마권을 처음 사본다고 했더니 김씨가 혀를 찼다.

“눈알 빠지게 이거(마권잡지) 들여다보긴 하는데 해보니까 말이니 기수니 다 소용 없어. ×× 그냥 운이야. 우리 둘이(건너편 남편을 눈짓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서 날린 돈이 12억원쯤 돼. 성인오락실에서 해먹은 돈도 있지만. 이거 하다가 인생 남는 게 없어. 시간만 낭비야. 근데 한번 오면 계속 와야 돼. 이게 될 듯 될 듯 하면서 안 되는 거거든. 미치는 거지. 젊은 사람이 이런 거 왜 해. 그냥 구경만 해. 절대 돈 걸지 말라고.”

장외발매소 주변에는 “화상경마에 미쳐 몇 억 잃었다”는 김씨 같은 사연이 널려 있었다. 발매소 건너편 분식집에서 소주를 마시던 최기창(가명·56)씨는 자신을 ‘뚝섬박이’라고 소개했다. 과천 경마장이 서울 뚝섬에 있던 1980년대 이후 20년 넘게 경마에 빠져 살았다. 최씨 역시 실제 경마장에서 말 뛰는 장면을 본 건 손가락에 꼽는다. 나머지는 화면 보고 돈을 거는 순수 ‘베팅’이었다.

최씨는 하루에 1억원까지 잃어봤다고 했다. 날린 돈을 신용카드로 돌려 막다가 지금은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래도 따는 날이 있으니까 잃어도 하는 거지. 내가 1억7000만원까지 따봤어요. 그런 날에는 숫자가 막 눈에 들어오지. 신들린 것처럼. 눈 뒤집히는 거야. 그리고 또 잃고. 오늘 잃으면 술 한 잔 하고 털고 내일 또 하고. 이 바닥이 그래.” 얼큰히 취한 최씨는 눈동자가 풀린 채 이렇게 말했다.

오후 6시. 장외발매소가 있는 마사회 건물 정문으로 10여차례 베팅을 끝낸 이들이 대열을 이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대승 ‘마권장외발매소 확장저지 및 이전추진위원회’ 공동대표는 “저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주변의 성인오락실, 술집, 퇴폐 마사지업소로 흩어진다”며 주위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갖가지 유흥업소 간판이 보였다. 1999년 장외발매소가 들어선 뒤 도박하는 이들을 겨냥해 생겨난 각종 ‘남성 전용’ 휴게방과 PC클럽, 게임장, 마사지, 성인클럽들이다.

동네가 유흥지대가 되면서 주거 환경은 급격히 나빠졌다. 자연스럽게 인구는 줄고 학생 수는 급감했다. 인근 월평초 학생은 2000년대 초반 160명에서 지난해 39명으로 감소했다. 동네에서 가장 좋다는 신축 빌라의 3분의 2는 2년이 넘도록 텅텅 비어 있다.

지역주민인 장정미 꿈터 마을어린이도서관 공동관장은 “경마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유령 같다. 아이들이 오가면서 그런 사람들과 섞이고 어렸을 때부터 마권이니 베팅이니 그런 데 익숙해지는 게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스러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마사회는 대전 장외발매소를 현재의 ‘2∼6층’에서 ‘2∼12층’으로 확장하는 방안을 추진하다가 주민반대에 부딪쳐 지난달 계획을 백지화했다. 대신 확장하려던 7∼12층은 문화스포츠센터로 바꿔 활용키로 했다. 하지만 이런 방안조차 지역주민들은 떨떠름해한다.

주부 홍재옥씨는 “도박장이 있는 건물에 문화센터를 왜 운영하나. 노래 부르러 갔다가 도박장에 들러보라는 것 아니냐”고 의심스러워했다. 김대승 대표도 “동네 한복판에 이런 도박장이 버젓이 운영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며 “외곽으로 완전히 이전하든지 폐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