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새겨진 문화와 민족 코드 (10) 우루과이] ‘월드컵’ 원조 최강팀 경제 하락에 축구도 내리막길

입력 2014-06-07 06:12 수정 2014-06-07 06:30

알고 있으면 좋은 상식 한 가지. 월드컵 초대 챔피언은 어느 국가일까? 정답은 우루과이다. 우루과이는 1930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과 1950 브라질월드컵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남미의 전통 강호다. 그러나 1970∼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폭정이 반복되자 축구도 쇠퇴의 길을 걸었다. 다시는 옛 영광을 재현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우루과이는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4위를 차지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축구 중심국에서 변방국으로=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세계 축구 최강을 가릴 수 있는 무대는 올림픽이었다. 우루과이는 1924 파리올림픽, 1928 암스테르담올림픽을 잇따라 제패했다.

올림픽에서 우루과이의 독주가 계속되자 세계 축구계에선 단일 종목 대회로 진정한 축구 최강자를 가리기 위한 대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월드컵이다. 1930년 역사적인 제1회 월드컵 개최 장소가 우루과이였던 이유는 바로 당시 최강팀이 우루과이였기 때문이다.

신생국에 속했던 우루과이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인접한 대국들에 맞서 나라의 기풍을 진작시키려 했다. 우루과이는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각각 우루과이가 자국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우루과이는 지금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유독 강하다. 우루과이는 제1회 월드컵 4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6대 1로 대파했고, 결승에선 아르헨티나를 4대 2로 무너뜨렸다.

우루과이 축구는 1950년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1950 브라질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브라질, 스웨덴, 스페인과 함께 결선 라운드에 진출했고, 2승1무로 두 번째 우승컵에 입을 맞췄다. 이후 우루과이 축구는 1970 멕시코월드컵에서 4강을 차지한 이후 급격한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우루과이 축구와 경제는 ‘닮은꼴’=우루과이 축구는 우루과이 경제와 궤를 같이한다. 20세기 초 세계 축구계의 강자로 군림했던 우루과이는 당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이 당시 복지제도의 골격을 갖춰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쇠고기 수출이 차질을 빚으며 물가가 상승했고,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노동자 파업과 이념투쟁이 잇따랐다. 사회 불안이 확산되자 결국 군부가 정치에 개입했다. 1985년 민간정부가 출범한 데 이어 좌파 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1999년부터 우루과이는 주요 수출 대상국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고, 주요 수출품인 육류에 치명적인 구제역이 발생하는 악재를 만났다. 2002년 7월엔 은행 영업을 강제로 중단하는 국가부도 직전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런 탓인지 우루과이는 2002 한일월드컵에서 조별예선 2무1패로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다.

우루과이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 및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 긴급 지원을 받아 금융구조 개혁 등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08년 해외 수출 수요의 증가 및 이에 따른 내수 회복으로 인해 실질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약 9%에 달했다. 우루과이 축구는 경제 회복에 힘입어 남아공월드컵에서 4위에 올랐다.

‘다크호스’로 꼽히는 우루과이가 브라질월드컵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루과이는 공격의 핵심인 루이스 수아레스(27·리버풀)를 앞세워 돌풍을 일으킬 태세다.

마이애미=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