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서환 (5) 면접장 소동에 애경 장영신 회장 “영어로 해보세요”

입력 2014-06-09 04:26
애경 재직 시절 장영신 회장으로부터 공로상을 받는 조서환 대표.

사회는 국가유공자와 가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면접에서 자꾸 떨어지자 취직도 못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점차 무서워졌다. 낙방 통보 후 면접장으로 다시 돌아간 것도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였다. 사회정의 측면에서 이러한 처사는 옳지 않다는 걸 면접관에게 꼭 말하고 싶었다. 전철역에서 번민하며 열차를 기다리던 나는 다시 회사로 뛰어갔다.

회사 앞에 도착하니 여러 사람이 날 막았다. 처음에는 수위가 막고 다시 비서실에서 막았다. ‘신입사원 면접 본 사람인데, 꼭 해야 할 말을 못해서 그러니 잠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젊은이가 하도 애원을 하니 이들도 전화로 물어본 뒤 길을 열어줬다. 면접을 마무리하고 좋은 인재를 많이 뽑았다며 담소를 나누던 면접관들은 나를 보더니 멈칫 놀라는 듯했다. 회사까지 달려오느라 얼굴이 빨개져 있었기에 상이군인이 술 마시고 행패 부리러 온 줄 알고 겁을 먹은 것이다. 이들 앞에 다시 앉은 나는 차분하게 할 말을 전했다.

“우선 전 깡패짓을 했거나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다친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위해 군에 갔고, 또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면접이 중단되는 설움을 받아야 합니까? 두 번째, 이곳 입사지원서엔 분명히 ‘국가유공자 우대, 10점 가점’이라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지키셨습니까? 세 번째, 글씨 쓸 때 양쪽 손에 펜 잡고 동시에 글 쓰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왼손잡이는 왼손으로,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씁니다. 여러분과 제가 뭐가 다릅니까. 물론 차 밑에 들어가 양손으로 차를 고치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진 못합니다. 하지만 모두 손으로 일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머리로 일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저보다 머리 좋다는 증거가 없다면 저를 떨어뜨릴 어떤 명분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도 군대에 갔거나 갈 예정인 자식들이 있을 겁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누가 예측하겠습니까. 혹시 자녀가 저 같은 입장이 됐을 때도 면접 중간에 내보내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이건 사회정의가 아닙니다. 합격시켜 달라고 말하러 온 거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왔습니다. 혹시 저 같은 사람이 면접을 보러 오면 최소한 따뜻하게라도 대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들인데 갑작스럽게 면접을 중단하고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는 것은 해선 안될 행동입니다. 회사가 발전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걸어 나오는데 누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장영신 회장이었다. 그때는 그분이 회장인줄도 몰랐다. 그는 껄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은 말로 갑작스럽게 상황을 반전시켰다. “영문과 나왔다고 했지요. 지금까지 얘기한 거 영어로 한번 해보세요.” 화가 나서 쏘아붙인 얘기라 말하고도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내 이야기니 영어로 못할 건 없지만 하자니 창피했다. 그렇다고 안 하자니 실력이 없다고 할 것인지라 진퇴양난이었다. 더구나 사회정의 차원에서 이야기했다고 해놓고 회장이 시키는 대로 영어로 이야기하면 뽑아 달라고 구걸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실력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내 뒤에 올 국가유공자에게도 안 좋을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어차피 영어로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 없을 텐데’란 배짱이 나를 담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장 회장은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었다. 영어로 이야기하던 도중 장 회장이 말을 끊었다. “나 혼자 뽑는 건 아니니까…. 이제 가 보세요.” 돌아서는 그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봤다.

이때 내가 얻은 것이 있다. ‘근성’과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라’란 가르침이다. 그날 나 스스로에게 말한 말이자 평생 기억할 다짐의 말이기도 하다. 지금도 어려울 때마다 그날의 용기를 생각하곤 한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