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언제까지 남들 따라 갈래?… 직업을 기획한 개척자들

입력 2014-06-06 03:05 수정 2014-06-06 11:06
서울 강남 한복판에 상가 건물을 빌려 만든 어린이 미술관이 있다. 입구에서 커다란 고릴라 인형과 종이상자로 만든 나무들이 어린이를 반긴다. 엄숙하고 조용한 전시관이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며 크게 웃고 노래하며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공간, ‘헬로우뮤지움’이다. 김이삭 관장이 기획해 2007년 개관했다. 그는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 개관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어린이 프로그램, 전쟁기념관 어린이 전시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아동 미술 전시 기획자다.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을 준비할 때만해도 저 같은 일을 하는 전문가를 뭐라고 부르는지, 어떤 기준으로 전공자를 채용해야하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린이를 위한 전시 기획·교육 분야를 개척하다시피 한 그는 ‘아이들에게 편안하고 친근한 전시 공간을 만들자’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국립중앙박물관 교육직 공무원 자리까지 박차고 나와 후배 미술가들과 함께 이 공간을 7년째 꾸려가고 있다.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기성사회의 틈바구니에 끼어들기 위해 고개 숙이고 자신을 거기에 맞춰가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만의 기획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젊은이들의 역할이 아닐까. 이 책은 헬로우뮤지움의 김 관장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세상에 작은 변화를 가져 온 경력 10년 안팎의 젊은 기획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은이 김영미씨는 “직업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려고 이 책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사회에 나와 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고 젊은이들만이 개척할 수 있는 영역도 많아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이나 일에 대한 생각은 고정된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안타까웠어요.”

이 책은 직업과 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지를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건축가인 소영식씨는 2009년 전북 완주의 퇴락한 농촌 마을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비비정(飛飛亭)마을은 관광 명소나 흔한 특산품 하나 없는 곳이었다. 개발의 사각지대로 남아 삼례군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가장 가난했다. 삼례군 특산물인 딸기도 이 마을에선 제대로 수확되지 않았다. 내세울 것이라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920년대의 양수장과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500년 된 정자뿐인 듯 했다. 마을 곳곳에 개발시설을 짓고 빈집을 리모델링해 카페 식당 민박집을 만들겠다는 사업제안서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주민들도 달갑잖아 했다. 팍팍하긴 해도 오랫동안 살아온 마을에 변화가 오는 것은 꺼려했다. 개발이니 마을공동체 회복이니 하는 말도 거추장스러웠다.

소씨도 막막했다. 사무실이 차려진 컨테이너에 출근해 마을 아주머니들이 해주는 밥을 먹고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그러기를 몇 달째, 소씨는 손에 쥐었던 사업제안서를 내려놓고 주민들의 일상을 관찰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일만 하고 살아온 어른신들의 정서적 황폐함이 보였다.

거기서 시작됐다. 아주머니들이 차려주는 맛깔스런 밥상을 레시피로 만들고, 먼지 쌓인 옛날 사진첩을 꺼내 전시회를 열었다. “요리법을 가르쳐 달라”며 사람들이 찾아왔다. 농가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청소년들이 몰려왔다. 마을에 아이들이 북적이며 돌아다니는 모습에 한 주민은 “우리 마을이 이렇게 예뻐 보이기는 처음”이라며 감동했다.

소씨는 마을 공동체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이 곳에 남아 더 좋은 지역 공동체 공간과 문화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기획을 구상하고 있다.

이 밖에도 뮤지컬 공연 기획자인 송한샘 쇼노트 총괄이사, 베이커리 기획자인 김혜준 컨설턴트, 홍보 기획자 윤형철 프레인 매니저, 도서공간 기획자 조성은 교보문고 대리, 비영리단체 모금 기획자인 김은영 도움과나눔 팀장 등의 사례를 기획노트와 인터뷰, 팁 등의 형태로 소개한다.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찾지 말고 삶을 기획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책이다.

‘젊은 기획자에게 묻다’는 경남 통영의 작은 출판사인 ‘남해의봄날’이 새롭게 펴내는 ‘어떤 일, 어떤 삶’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작은 식당 주인들을 소개한 ‘젊은 오너셰프에게 묻다’라는 두 번째 책도 함께 나왔다. 자신만의 레시피로 삶을 요리해 담아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이 시리즈를 기획한 편집자 장혜원 박소희씨는 “간판으로서의 직장이 아닌 꿈이 담긴 직업을 선택해 소신과 원칙을 갖고 일하는 젊은 직업인의 이야기가 던질 힘이 궁금하다”면서 “각자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한다면 우리 사회 문제의 상당수도 해결될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