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전 11시쯤 서울 노원구 청계초등학교 앞. 모두 시각장애 1급인 한만옥(55) 김명자(55·여)씨 부부가 활동보조인의 양손을 붙잡고 중계2·3동 제6투표소로 향하고 있었다. 열 살 남짓한 남자 어린이 셋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자 바람이 쉭 불었다. 그 순간 한씨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고 활동보조인의 팔목을 잡고 있던 아내의 손등에는 잠시 핏줄이 섰다가 사라졌다. 아이들의 꼬마 자전거도 그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다.
◇“투표하면 장애인의 일상이 바뀐다”=한씨는 날 때부터 녹내장을 앓았다. 서너 가지 색은 간신히 구분했지만 안압 때문에 통증이 날로 심해졌다. 결국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안구를 적출했다. 그런 한씨에게 외출은 모험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20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투표를 해오고 있다. “내 일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그는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구청장이나 구의원이 되면 확실히 동네 환경이 바뀐다”고 했다.
집 현관에서 300m 떨어진 투표소 입구까지 도착하는 데 정확히 28분이 걸렸다. 비장애인이 보통 걸음으로 가면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직원은 시각장애인용 점자가 인쇄된 투표 보조도구에 투표용지를 끼워주며 한씨 부부를 기표소로 이끌었다. 직원과 활동보조인이 기표소 안에서 이들의 소중한 한 표 행사를 도왔다. 기표소 안에 여러 명이 들어가는 것은 비밀투표 원칙에 어긋나지만 혼자 힘으로 투표하기 어려운 장애인들은 어쩔 수 없다.
“거기다 찍으시면 안 되죠. 비뚤어졌어요.” 직원이 엉뚱한 여백에 도장을 찍으려는 한씨의 팔을 붙잡았다. 투표를 마치고 나온 한씨가 “20년 넘게 투표해 왔으니 내가 더 베테랑”이라며 직원에게 농담을 건넸다. 웃음이 터졌다. 지켜보는 투표사무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한씨는 “요샌 당뇨 등으로 살다가 시력을 잃게 되는 ‘중도 실명자’들이 많다”며 “중도 실명자들은 점자를 잘 못 읽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새로 뽑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동네에서 점자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통계도 내고 모니터링도 해 달라고 부탁할 계획”이라고 했다.
◇‘산 넘고 물 건너’ 투표하러 가는 길=같은 시각 인근 원광초등학교의 중계1동 제2투표소 입구. 앞 유리에 ‘장애인 투표활동 보조 지원차량’이라는 흰색 종이가 붙은 12인승 노란색 밴이 섰다. 문이 열리자 신삼균(74)씨가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휠체어 리프트를 타고 힘겹게 차에서 내렸다. 처음 차에 탈 때 잘 고정되지 않아 한참 시간을 끌었던 리프트는 내릴 때도 말썽이었다. 그렇게 투표소 앞에서 10분이 흘렀다.
신씨는 2012년 중풍으로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고 보조기구 없이는 한 걸음도 떼기 힘든 몸이 됐다. 그럼에도 한 번도 투표는 거르지 않았다. 그는 “정치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며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투표소에 들어섰다.
투표소 입구에는 휠체어가 들어오기 쉽도록 고무 받침대가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신씨 혼자 힘으로 받침대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투표하러 온 비장애인 10명이 줄을 서 있었지만 신씨가 들어오자 모두 양보했다. 활동보조인이 휠체어를 밀어 신씨가 투표하기 편하도록 기표소 안에 자리를 잡아줬다. 일부 주민이 투표하는 신씨를 보며 수군댔다. 30대 남성은 “몸도 불편한 노인이 다 왔네”라며 힐끔거렸다.
사전투표율이 예상보다 높아 지방선거 사상 최고 투표율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장애인들의 투표 열기도 뜨거웠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예상치 못한 난관도 많았다. 경남 창원의 한 투표소에서는 시각장애인 투표 보조 용구가 잘못 지급돼 급하게 교체하는 소동을 빚었다. 도의원 선거 보조 용구에 기초의원 기호를 표시한 점자 스티커를 붙인 것이다. 이 밖에 지체장애인이 투표소로 가는 통로에 휠체어가 걸려 들어가지 못하거나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읽지 못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한 시각장애 1급 류창동(24)씨는 “점자를 못 읽는 시각장애인도 꽤 많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용 스크린리더(화면을 읽어주는 프로그램)로 투표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놨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6·4 국민의 선택] 투표소 가는 길도 기표도 험난… 시각·지체장애인 ‘소중한 한표 행사’ 동행기
입력 2014-06-05 0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