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서비스 실명제’ 도입을

입력 2014-06-05 03:34

수원화성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데는 공사실명제가 큰 역할을 했다. 정조의 명에 의해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공사 담당자의 명단과 공역 일수, 각 시설물의 위치와 모습, 비용 등을 낱낱이 기록한 일종의 백서(白書)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정조는 축성의 책임소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목수, 석수 등 축성에 참여한 2000여명의 이름을 화성성역의궤에 남겼을 뿐 아니라 팔달문과 창룡문의 석벽에는 석수의 이름까지 새겼다.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고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버린 수원화성은 이 화성성역의궤 기록을 바탕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됨으로써 진정성을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공사실명제는 600여년 전 서울을 둘러싼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부터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한양도성에서 발견된 각자성돌이 그 증거로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이 “공사를 담당한 장교와 석수의 이름을 새기고 성곽이 무너지면 책임을 물어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전기에 축성된 전남 영광의 법성진성 성돌에도 공사 감독관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공사실명제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행정투명성과 책임감을 높이기 위해 중앙행정기관과 광역자치단체에서 제한적으로 시행되던 ‘정책실명제’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기초자치단체는 물론 국립대학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공무원 인사카드에 중요 정책을 결정한 사항을 명시하고 공무원들의 회의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해 책임소재를 밝히고 평가자료로 활용한다면 세월호 참사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덕분에 6·4지방선거에서는 후보자들이 경쟁적으로 정책실명제 대상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정책을 시행한 공무원과 감리한 공무원까지 책임 소재의 대상을 넓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책실명제가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등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당근과 채찍’도 뒤따라야 한다. 자칫 무책임하고 잘못된 정책으로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본다면 그 정책을 입안한 공무원의 이름은 평생 ‘주홍글씨’가 되어 불명예로 남을 것이다. 반면에 국민을 위해 훌륭한 정책을 입안한 공무원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공덕비가 될 것이다.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은 최근 서울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추돌사고로 안전불감증이 연이어 도마에 오르자 ‘안전점검 실명제’를 도입하고 사회 전 부문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안전점검 실명제는 공공부문은 물론 민간에도 확대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이 땅에 다시는 청해진해운 같은 부도덕한 기업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데는 실명제만큼 효과적인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변추석 한국관광공사 사장도 최근 취임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여행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관광객의 만족도를 제고하고 서비스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어떤 대책이 나올지 지켜봐야겠지만 불친절과 바가지로 대표되는 한국관광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는 최일선에서 관광객을 응대하는 음식점과 택시 등을 대상으로 ‘서비스 실명제’를 도입하는 것만큼 유효한 제도는 없을 것이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화장실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은 청소 관리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청소실명제’를 계기로 더욱 청결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전불감증과 불친절의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수원화성의 ‘공사실명제’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의 ‘청소실명제’처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 석자를 걸고 매뉴얼대로 책임과 서비스를 다하는 실명제에서 비롯되어야 마땅하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