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4)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어

입력 2014-06-06 10:42 수정 2014-06-06 19:48
초막절에 생명의 물을 긷던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시내 서쪽에 있으며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5세기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공으로 파괴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행한 가나의 기적교회.
나다나엘 기념교회는 나다나엘이 가나 출신이기 때문에 이곳에 세워졌다. 빌립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다(요1:47).
예수님 당시 포도주를 담았던 물항아리.
어려서부터 서른 살까지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피며 ‘나사렛 사람’으로 살아온 예수는 순종하는 아들이었고, 회당의 두루마리를 읽고 기도하며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기다림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어 나사렛을 떠나면서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두드림의 지혜’라는 것이었다.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8)

서른 살이 되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요단강으로 가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려는 ‘두드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두드림에 하늘을 열고 응답하셨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나다나엘이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 즉 유사하면서도 선택을 필요로 하는 두 가지 명제를 꺼냈을 때에도 그는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두드릴 것을 이미 결심하고 그에게 단언했던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빌립과 나다나엘을 먼저 보내 놓고 유대 광야로 들어간 것은 그 두 가지 명제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을 구하는 ‘두드림’이었다. 그 광야 전쟁에서 마귀의 공격 대상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고, 그것을 ‘말씀’으로 물리쳤다. 그리고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마귀의 미혹에서 ‘이스라엘의 임금’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서 그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려는지에 관해 분명한 응답을 구하려고 나다나엘이 살고 있는 가나로 향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초청을 받은 혼인 잔치에 빌립과 함께 참석했다. 그때 이 잔칫집에 와서 주방 일을 돕고 있던 모친 마리아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온 것이다. 모처럼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던진 모친의 말은 좀 뜻밖이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31년 전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 준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마리아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둔 채 서른 살이 되도록 묵묵히 목수 일만 하고 있는 아들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가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한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들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부를 때 쓰는 최대의 존칭 ‘My Lady’와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돌아온 아들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아직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 받은 말씀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제 마리아는 더 이상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처녀로서 잉태하는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담대한 성품을 지녔고, 그만큼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신중한 대답을 개의치 않고 하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예수는 눈을 크게 뜨며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어휘 때문이었다. 그는 요단강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고, 마귀와의 전쟁을 ‘말씀’으로 이긴 후 계속해서 줄곧 ‘말씀’에 관해 생각하며 자신의 장래 일을 지시하실 아버지의 다음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보였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요 2:7)

선지자들은 물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은 그들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초막절에는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다가 성전 뜰에 붓는 행사도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예수께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 것은 정결의 예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라는 뜻이었다. 아버지의 응답을 기대한 ‘두드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포도주는 본래 생명의 상징이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또 포도주는 인간의 기쁨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전 1:19)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처음 주신 선물도 포도원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그러나 생명과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는 인간이 절제를 잃어가면서 차츰 실패와 타락의 상징으로 변해갔다. 노아는 그의 장막에서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들었다가 다시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고, 그의 자손들은 결국 포도주에 취하여 쾌락에 빠지고 다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 것이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 20:1)

뿐만 아니라 불의와 범죄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잠 31:5)

그리고 마침내 생명의 상징인 포도주는 피가 되었다.

“너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사 49:26)

그러므로 물 즉 ‘말씀’이 포도주가 된 것은 그 본래의 의미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라는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이때로부터 예수께서는 모친 마리아와 빌립과 나다나엘, 그리고 기적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형제들과 함께(요 2:12) 가버나움 등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증거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4∼15)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