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는 현대축구에 혁명을 일으킨 ‘토털사커’의 고향이다. 토털사커는 한마디로 전원 공격, 전원 수비 전법이다.
◇공간 활용의 창조물, 토털사커=‘바다보다 낮은 땅’에 살고 있었던 네덜란드인들은 땅을 늘리기 위해 둑을 쌓아 풍차로 바닷물을 퍼냈다. 그들은 좁은 땅과 많은 인구로 인해 공간 활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공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혁신적으로 공간을 활용해야 했고, 이것이 축구에 접목돼 토털사커가 탄생했다.
토털사커가 탄생한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20세기 초 잉글랜드에 존 레이놀즈라는 무명의 축구선수가 있었다. 레이놀즈는 암스테르담의 클럽팀 아약스 감독을 맡았다. 아약스는 토털사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벌떼 공격과 벌떼 수비로 전력이 급상승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토털사커는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다.
훗날 진정한 토털사커로 세계 축구 판도를 뒤엎은 인물을 리누스 미헬스였다. 1946년 18세의 나이에 참전용사가 돼 귀향한 미헬스는 아약스에게 뛰게 됐다. 헤딩의 달인이었던 그는 조직력의 의한 득점에 주목했다. 그는 1958년 은퇴해 1965년 친정팀 아약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토털사커를 활짝 펼쳤다.
◇멀티 플레이어의 축구 예술=그렇다면 토털사커란 어떤 것일까? 간단히 말하면 A선수가 자기 포지션에서 벗어나면 그 자리를 B선수가 메우며 전원 공격과 전원 수비를 하는 전술이다. 멀티 포지션을 소화해야 하는 이 전술은 실전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무쇠 같은 체력이 필요하고, 선수 전원이 비슷한 기량을 갖춰야 한다. 팀의 중심에서 선수들을 하나로 이끌 수 있는 천재적인 리더가 있어야 한다. 네덜란드엔 그런 선수가 있었다. 바로 요한 크루이프다. 키 1m80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크루이프는 미헬스에 의해 세계 최초의 중원 에이스로 성장했다.
네덜란드는 1974 서독월드컵 첫 경기에서 우승후보 우루과이를 2대 0으로 제압했다. 팀 전원이 포지션을 바꿔 가며 상대를 무너뜨리는 전술에 전 세계 축구팬들은 경악했다. 네덜란드는 결승에 오르기까지 6경기에서 14득점 1실점(자책골)이라는 놀라운 골 결정력을 과시했다. 개최국 서독은 네덜란드의 경기 스타일을 분석해 결승전에서 2대 1로 승리를 거두며 토털사커의 돌풍을 잠재워 버렸다. 만일 서독이 긴급히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면 경기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서독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축구 혁명을 일으켰다.
네덜란드 출신의 토털사커 감독들은 인재를 키워 제자로 만들고, 제자가 성장하면 더 큰 무대로 내보내는 경향이 있다. 실례로 미헬스와 토털사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박지성을 PSV 에인트호벤으로 데려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진출시켰다.
네덜란드는 축구 수출국으로 유명하다. 중개무역국답게 유망주들을 키워 큰 시장에 내다파는 데 능하다. 또 감독들도 전 세계를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축구 평준화에 큰 역할을 한다. 전문가들은 늘 네덜란드 축구를 주목하고 있다. 변화에 능동적인 네덜란드인들이 토털사커를 능가하는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왜 오렌지군단일까=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이 ‘오렌지군단’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덜란드는 예전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으며 막대한 세금을 바쳐야 했다. 그러다가 16세기 스페인이 종교마저 가톨릭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자 네덜란드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독립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오랸냐 가문은 후에 국민의 요구에 의해 왕가로 추대됐다. 오랸냐는 영어로 오렌지(Orange)이며, 오렌지색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색이 됐다.
마이애미=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축구에 새겨진 문화와 민족 코드 (8) 네덜란드] 전원 공격·수비 ‘토털사커’ 세계 축구 판도 뒤엎어
입력 2014-06-05 02:30 수정 2014-06-05 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