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서환 (4) “한 손밖에 없어 안된다” 취업 냉대를 극복하다

입력 2014-06-06 03:05 수정 2014-06-06 11:05
1982년 대학 졸업식 때 가족과 함께한 조서환 대표.

수류탄 사고로 22세에 상이군인이 됐다. 1초만 늦게 수류탄을 집었으면 내 몸은 그대로 공중분해됐을 것이다. 간호장교는 머리에 파편이 너무 많이 박혀 얼마나 더 살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신의 가호가 있어 날 살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른손 외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삶의 전략을 다시 짜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하루빨리 재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선 나는 왼손으로 글씨쓰기 연습에 돌입했다. 지금도 생각해본다. 만일 내게 크리스천인 아내가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매일 기도하는 아내를 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장인어른은 나와의 결혼을 크게 반대했다. 하지만 장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딸에게 가난한 오른손잡이가 오른손도 없이 청혼했다. 이런 남자와 기어코 결혼하려는 딸이 얼마나 딱하고 한심스러웠을까. 하지만 딸의 계속된 설득에 결국 결혼을 허락했다. 만약 내 딸이 아내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난 장인어른과 같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리라. 장인어른이 참 위대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결혼은 급속히 진행됐다. 우리는 약혼사진을 찍고 사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릴 돈이 없다고 하니 불교신자인 큰형이 우격다짐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와 결혼한 곳이 하필 절이라니. 그럼에도 모든 것을 참아준 아내에게 정말로 고마웠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오른손이 불편하니 손을 많이 안 쓰는 직업으로 미래를 구상했다. 손보다는 입을 많이 쓰는 영문과 교수가 되겠다고 고민 끝에 결정했다.

영문과 교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왼손으로 공부해 경희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꿈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하는 도중 덜컥 딸 희수를 임신하게 됐다. 생활비가 없으니 낳지 말자고 했지만 아내는 절대 안 된다며 맞섰다. 하지만 고생하는 김에 일찍 애를 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낳기로 했다. 아이 열 명을 낳은 어머니도 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다 가지고 나온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가. 낳고 보니 아이는 정말 귀엽고 예뻤다. 이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도 느꼈다.

1년 뒤 아내는 아들 재영이를 낳아 덕분에 4학년 때 두 아이 아빠가 됐다. 가족 생계를 위해 유학을 가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취직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느 회사도 한 손 없는 날 뽑으려 하지 않았다. 과 동기들은 모두 일찌감치 취업했는데 나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다. 1981년 하반기 채용의 마지막인 애경유지 면접에서도 손이 없다는 이유로 면접 현장에서 낙방 통보를 받았다. 지하철역에 서 있는데 문득 자살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곧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다.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어 면접장으로 돌아가 면접관에게 따졌다. 일은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일하는데 왼손이든 오른손 글씨든 무슨 상관이냐고. 다행히 이 용기를 장영신 회장이 높이 사 나는 졸업 전 입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입사 후 다소 여유가 생긴 나는 새 전셋집에 내 걱정뿐이던 부모님을 모셔왔다. 그간 당신들이 흘린 눈물을 닦아 드리기 위해서였다. 취직 이후 참 신비스럽게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불러온 것도 있지만 장모님과 아내의 엄청난 기도 덕분이리라. 역경은 힘들지만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사고로 손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그래서 고난도 축복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