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고유환] 북·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려면

입력 2014-06-05 03:34

지난달 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일회담에서 양국은 불행한 과거 청산, 일본인 납치 문제 등 현안 해결, 국교 정상화 실현 등에 합의했다. 우리 정부는 무엇보다 일본 아베 정부의 독주가 중국까지 동참하고 있는 한·미·일 대북 공조를 허물어 북핵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이번 북·일 합의는 장기간 교착되고 있는 동북아 정세를 요동치게 만들어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면서 6자회담 재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사회주의권 붕괴 무렵인 1990년대 초부터 서방과의 대타협 전략을 구체화하면서 가장 먼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려고 했다. 김일성 조선노동당 총비서와 가네마루 신(金丸信) 자민당 부총재가 ‘당 대 당’의 국교 교섭을 시작했지만 일본인 납치 문제인 이른바 ‘이은혜(李恩惠) 문제’가 불거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미국이 호응하지 않은 것과 북한 핵 개발 의혹이 불거진 것도 교섭 중단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북한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40억∼100억 달러에 이르는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아 경제를 재건하려고 했다.

도쿄로 먼저 가려던 북한의 노력이 실패하자 북한은 북·미 적대관계 해소가 ‘생존의 중심고리’라고 보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북한은 유일 패권국가인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없인 북·일 국교 정상화가 어렵다고 보고 미국과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워싱턴을 통해야 도쿄나 서울로 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북·미 간에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문제, 주한미군 문제,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등 복잡한 현안들이 얽혀 관계 개선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남북관계 개선이다. 북한은 서울을 경유해야 워싱턴, 도쿄도 쉽게 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이다.

예상대로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고, 2002년 9월 북·일 평양선언을 하는 등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기본 문서들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 발목을 잡은 것은 2002년 10월에 제기된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 개발 의혹 문제였다. 당시 미국의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관련 증거를 제시하면서 다그치자 북한은 HEU 핵 개발 의혹을 부인하지 않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내밀었다. 평양선언에서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는 ‘고백외교’를 했지만 역풍이 거세게 일어나고, HEU 핵 개발 문제가 2차 북핵 위기로 비화하면서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 노력도 중단되고 말았다.

이번 스톡홀름 합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북·일 평양선언을 되살려 최종적으로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는 불씨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핵 문제와 과거사 및 영토 문제 등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외톨이로 전락하고 있는 북·일 양국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포괄적이며 전면적으로’ 해결할 경우 국교 정상화 교섭을 곧바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미 관계처럼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이 없기 때문에 북한과 일본은 정상들의 정치적 결단만 있으면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 납치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고 경제 재건을 위한 ‘종자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미 이러한 정치적 결단 아래 일본과의 교섭을 재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북·일 관계도 중요하지만 미·일동맹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북핵 문제의 진전 없이 곧바로 북한과 수교를 추진하는 데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결국 북·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려면 6자회담 재개를 통한 북핵 해결에 진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과거 두 차례의 북·일 국교 정상화 노력에서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고유환(동국대 교수·북한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