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찾은 하날로레 리앙케 “모국어 충분히 습득한 후 영어 배워야 효용성 높아”

입력 2014-06-04 03:28
하날로레 리앙케 세계통번역대학원협회 명예회장이 2일 서울 한국외대 국제관에서 올바른 영어교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영희 기자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외국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글로벌 시대에 성공을 위한 필수 요소이자 개인의 자기계발 의지를 평가하는 가늠자 역할도 한다. 그래서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어학연수를 다녀오며 취업 때 갖가지 영어시험 성적표도 제출해야 한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원장 방교영 러시아어과 교수)이 지난 2일부터 이틀간 서울캠퍼스에서 '공용어 시대의 동·서 간 소통'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 하날로레 리앙케 세계통번역대학원협회(CIUTI) 명예회장이 참가했다. 그를 2일 한국외대 국제관에서 만나 영어 사교육 시장만 연간 2억4000만 달러에 달하는 한국의 영어교육에 대해 평가와 조언을 구했다.

리앙케 회장은 한국사회의 영어 열풍에 대해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은 분명 효과적이며 '원어민에 가깝게' 배우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모국어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에 이민이 빈번해지면서 모국어 개념이 흐려졌던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리앙케 회장은 "언어는 개인의 성격·인성 형성의 뿌리가 되고 국가의 정체성 형성 과정까지 좌우한다"며 "이 때문에 외국어 학습의 역효과를 심리적 성격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연구까지 세계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언어 자체보다 그 언어를 통해 전파되는 문화와 사상 등의 콘텐츠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언어는 숟가락 같은 '도구'일 뿐"이라며 "모국어 교육을 통해 문화적 배경과 정체성을 충분히 축적한 뒤 영어로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영어의 효용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앙케 회장은 영어에는 '표준'이 없다는 점도 언급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지역과 계층에 따라 발음과 표현이 서로 다르다. 그는 "한국이 '국립국어원'처럼 전담 기관을 두고 옳고 그른 표현을 규정하는 것과 달리 영국 독일 등에선 언어를 규정하지 않는다"며 "표준 개념으로 영어에 접근하는 것은 무척 까다로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리앙케 회장은 "영국 상류계급이나 문헌학자들이 사용하는 소위 BBC 영어나 옥스퍼드 영어 역시 표준이라기보다 고급 영어라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미국영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미국영어는 하나의 유행에 불과하다"며 "지나치게 미국식 영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영어 실력에 따른 서열화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는 "영어를 잘하면 진로 선택에 유리하다보니 영어 실력에 따른 사회적 신분이 공공연히 나타나고 있다. 이는 영어를 배우는 나라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라며 "특히 유럽에 비해 교육열과 교육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더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다만 "영어만이 계층화의 절대적 수단이 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라고 꼬집었다.

리앙케 회장은 "일상적인 영어와 심도 있는 내용을 동시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영어 학습 방법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전문 통·번역의 중요성이 강조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2004년 외대 통번역대학원이 CIUTI에 아시아 최초로 가입한 지 10주년을 맞아 열렸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