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 서민과 중소기업들이 공정한 룰에서 경쟁하도록 하겠다는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해 많은 표를 얻었다. 대표적인 공약이 ‘일감 몰아주기’ 규제였다. 대기업들이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자산을 불리고 편법으로 부를 대물림하는 악습을 끊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지난 한 해 동안 공기업을 제외한 자산 상위 10대 대기업의 내부거래액이 154조2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2조9000억원 늘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고 한다. 재작년 감소했던 10대 대기업의 내부거래액이 다시 늘어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자제하고 중소기업에 문을 열겠다고 경쟁적으로 발표했던 대기업들이 말뿐이었지 실천은 안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는 SK LG 롯데 포스코 한진 등 5개 그룹에서 증가했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데는 정부 책임이 작지 않다. 올해 2월 발효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따라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기업 중 대주주 일가 지분이 30%를 넘는 상장사(비상장사 20%)의 내부거래 금액이 200억원 또는 연간 매출의 12% 이상일 경우 규제를 받는다. 하지만 상당수 기업들은 내부거래 자체를 줄이기보다 계열사 간 합병이나 사업 조정을 통해 내부거래 비중을 낮추거나 대주주 일가 지분율을 낮추는 방식 등으로 규제망을 빠져나갔다. 실제 37개 대기업의 1171개 계열사 중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이 2012년 117개사였으나 지난해에는 105개사로 10%가 줄었다. 삼성에버랜드 등 사업부문 조정에 따른 실적이 지난해 공시에 반영되지 않은 곳까지 포함하면 규제망을 벗어난 회사는 훨씬 많을 것이다.
정부는 기업들의 로비 공세에 밀려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대폭 완화해 놓고 이마저 무용지물이 됐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는 기업에 기는 정부’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마땅하다. 대선 기간과 지난해 상반기 동안 경제민주화를 외쳐댄 게 민망하지 않은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규제망을 좀더 촘촘히 하고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기업들이 규제를 빠져나가기 위해 아예 꼼수를 부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시행령 등을 면밀히 다듬는 게 시급하다.
대기업들은 국민들 사이에서 반기업 정서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곰곰이 자성해봐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급성장한 계열사들을 상장시켜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삼으려는 기업에 쏠리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적으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요즈음이 아닌가.
[사설] 경제민주화는 마이동풍, 내부거래는 더 늘고
입력 2014-06-04 02:59 수정 2014-06-04 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