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잊혀질 권리’ 잊은 네이버

입력 2014-06-04 02:29 수정 2014-06-04 03:27

지난달 유럽사법재판소가 내린 ‘잊혀질 권리’의 여진이 인터넷 공간을 흔들고 있다. ‘표현의 자유’ 위축을 우려하는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사이버 세계의 새로운 권리장전’이라는 환호가 크다. 실제로 구글이 정보 삭제를 위한 웹페이지를 열자마자 하루 1만2000건의 신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권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광대역적 요소가 있기에 모든 나라에 핫이슈가 된다.

‘잊혀질 권리’는 알려진 대로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가 제기했다. 2009년 구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니 1998년 빚 때문에 집을 공매에 내놓았다는 기사가 검색된 것을 보고 분개했다. “이는 지극히 사적인 일이고, 그나마 몇 년 전에 해결돼 공익적 관련성이 전혀 없다”며 기사 삭제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구글을 상대로 소송 끝에 세기의 판결을 이끌어 내기에 이르렀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비슷해 이전부터 주요 포털에 자신의 글을 지워 달라는 글이 넘쳤다. 그러나 지식IN 등 공개 게시판에 올린 글에 댓글이 붙으면 마음대로 삭제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작성자는 글에 대한 자기통제권을 주장하는 반면 포털 운영자는 게시판이 가지는 상호작용 시스템을 지키려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자신의 정보가 언론에 보도되면 더욱 복잡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언론의 자유라는 가치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개인정보 과다 노출 위험하다

‘잊혀질 권리’와 관련해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네이버의 ‘뉴스라이브러리’다. 나도 곤잘레스 변호사처럼 인터넷 공간에서 내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나 살피려 이름 석자를 쳤더니 62건이 검색됐고, 그 중 일부가 오래된 흑백 신문으로 재현됐다. 활자를 키워보니 84년 수습기자 합격 사실부터 언제 어디서 누구와 결혼한 일, 부모상을 당한 일자와 장지까지 나와 있었다. 인터넷 이전에 생산된 정보까지 무차별적으로 통째 오르는 것이다.

누가 허락했나? 나에 관해 그나마 부정적 평판의 기사가 실리지 않은 것은 운이 좋을 뿐이지 반대의 경우를 상정하면 소름 끼치는 일 아닌가? 네이버는 ‘신문 속 역사기록의 가치를 재발견한다’며 큰돈을 들여 일부 신문의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로 복원한다지만 이는 ‘잊혀질 권리’를 비롯한 많은 쟁점을 야기한다. 사실을 보도한 뉴스의 재현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먼저 법적 근거 없이 사실의 공표를 소급한다는 것은 형사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범죄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로되 누구든 규범의 일탈을 생각할 땐 처벌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 신체의 구속이나 재산형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비난, 명예 손상의 범위까지 예측한다. 실명 공개의 범위도 여기에 포함된다. 따라서 본인의 이름이 뒤늦게 온라인에서 유포되는 것은 소멸시효의 연장이나 마찬가지다.

옛 기사 디지털 복원 신중해야

신문 기사의 복원이 가져올 또 다른 문제는 저작권 침해가 무더기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가 신문에 기고를 했다면 그 글의 저작권은 기고자에게 있다. 그 기고자가 살아있거나 사후 70년이 지나지 않았다면 저작권은 엄연히 살아있다. 그런데도 권리자의 동의 없이 인터넷 공간에 글을 올리면 종이신문에 1회용으로 기고한다는 당시의 관행을 벗어났으니 이용 허락의 범위를 넘어설 공산이 크다. 사진이나 초상도 마찬가지다.

네이버는 이런 사정을 감안해 옛 신문의 복원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미 이뤄진 디지털 기사에 대해서도 권리처리를 말끔히 해야 한다. 네티즌들의 고양된 의식을 감안하면 자칫 소송대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사법재판소가 인정한 ‘잊혀질 권리’는 사이버 공간의 법리 다툼에 유력한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손수호 인덕대 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