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서환 (2) 소위 임관 기쁨도 잠시… 수류탄 사고로 한 손을

입력 2014-06-04 02:59 수정 2014-06-04 15:39
조서환 세라젬 헬스앤뷰티 대표의 육군3사관학교 생도 시절 훈련 모습.

나는 청양고추로 유명한 충남 청양 칠갑산 자락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늘 하늘이 푸르고 햇볕이 좋아 우리 고장 고추와 구기자는 유난히도 맵고 빨갰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이곳에서 대대로 고추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자그마치 자녀를 10명이나 낳으셨다. 어려서 두 명이 죽고 8명만이 살아남아 성장했다. 우리는 대개 두 살 터울이다. 어머니는 무려 20년간 애를 낳은 것이다.

나는 8남매 중 5번째다. 무척이나 가난한 형편 탓에 아버지는 8남매를 모두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지금도 작은누나가 중학교 안 보내준다고 슬피 울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늘 부족한 형편에도 어머니는 머리에 쌀을 이고 십리 밖의 절에 꼬박꼬박 공양미를 바쳤다. 자녀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빈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불교 집안에서 자란 내가 크리스천 아내를 만나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다.

아버지는 형제들 중 나를 유난히 잘될 놈으로 믿었다. 골목대장으로 애들을 호령하고 다니며 또래보다 기골이 장대한 모습 때문에 대장 감으로 보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혼은 자주 내면서도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다. 그래서일까.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매우 권위적인 분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끔 나를 칭찬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의 일이다. 내 손을 잡고 서울에 다녀온 아버지께서 식구 앞에서 내 칭찬을 했다. "허허허, 얘는 서울 데리고 가도 서울 놈들하고 하나 다를 게 없어. 서울 시내를 자기가 앞장서 가는 거야. 어깨 쫙 펴고 신세계백화점도 막 휘젓고 돌아다니고. 얼굴도 그렇지, 이놈은 크게 될 거야."

네다섯 살 때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매번 이렇게 답했다. "서울군수요, 서울군수." 서울군수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러자 할머니와 아버지도 '얘는 서울군수 될 놈'이라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춤을 잘 췄던 것도 가족에게 '될성부른 놈'으로 보인 한 요인이다. 시골에서 춤 경연대회를 하면 나는 항상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서울 놈들과 맞붙어도 하나도 부족한 게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부터 자신감이 커졌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고등학교까진 시골에서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공부도 공짜로 하고 취직도 동시에 되는 직업군인이 내 갈 길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는 육군3사관학교에 진학해 2년간의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았고 자신감 넘쳤던 내게 운명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수류탄 사고로 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젠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아버지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 끔찍하다.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당시 내가 아버지였다면 정말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장 기대했던 자식이 그리됐으니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

그때 난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봤다. 지금까지 우는 모습은 전혀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5분간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보다 못한 내가 병상에서 아버지를 위로했다. "아버지, 군 생활은 더 이상 못하지만 저 살아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내가 자살할까 걱정됐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 재산 다 팔아 너 줄 테니 꼭 살아야 한다." "네, 반드시 멋지게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부자간의 대화는 무거웠다. 손 잃은 소위가 아버지를 위로했다는 소식은 간호장교에 의해 온 병원에 소문이 났다. '대단한 육군 소위! 저 상황에 아버지를 위로하다니!' 존경심이었을까. 이후 모든 간호장교들이 잘해줘 투병생활을 조금이나마 편히 할 수 있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