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정치가 미쳤다

입력 2014-06-02 05:05

“대안 없이 비판만 하는 야당이나, 무작정 대통령 감싸려는 여당이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세월호 참사라는 대재앙 앞에서는 정치권이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 모른다고 내심 기대했건만, 제 버릇 남 줄까 종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태의 연속이다.

세월호 사고 직후만 해도 여야는 힘을 모으는 듯했다. 서로서로 입 조심, 술 조심하면서 비교적 경건한 자세를 유지했다. 네 탓은 없었고, 내 탓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슬슬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싸움질을 하고 있다. 내 탓은 사라졌고, 네 탓 타령뿐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 참담함이 가득한데 무슨 짓들인지 모르겠다. 6·4지방선거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싶다.

박근혜정부의 잘못은 적지 않다. 수습 과정에서 우왕좌왕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박 대통령이 수차례 국민에게 사과하고, 총리를 경질키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나 ‘안전한 대한민국’이라는 지상과제를 향해 국력을 결집할 때가 됐다. 아니 이미 지났다. 세월호가 침몰한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서부터 책임자 및 유병언과 같은 양심 없는 사람들을 엄벌하고 나아가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공직사회를 혁신하고,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정치권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게 해도 세월호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을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9·11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의 여야 정치인들이 한목소리를 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안타깝지만 그건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인 듯하다.

야당은 지난달 중순쯤부터 박 대통령을 연일 압박하고 있다. 사과하라, 국가정보원장과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바꾸라는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자 그 다음엔 총리 후보로 지명된 안대희 전 대법관의 결점을 집중 부각해 중도 하차시켰다. 안 전 대법관의 과도한 수임료가 근본 원인이지만, 노무현정부 당시 그가 대법관으로 임명됐던 점을 고려하면 야당의 공격이 순수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어 ‘안대희 파동’은 인사위원장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책임이라며 김 실장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야당은 앞서서도 ‘기춘대원군’ ‘왕실장’이라 부르며 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 정국이 이토록 꼬인 데에는 김 실장의 책임이 없지 않아 그의 퇴임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야당의 모든 당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김 실장을 비난하고 있는 건 박 대통령에 대한 또 다른 압력이요, 지방선거에서의 표를 의식한 공세의 성격이 짙다고 하겠다.

여당의 반격 논리는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다. 나랏일이 야당의 태클로 계속 꼬꾸라지고 있으니 ‘슈퍼 야당’을 모시고 어느 대통령이 일할 수 있겠느냐는 윤상현 사무총장 발언이 대표적이다. 국정 공백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데에도 야당 책임이 크다고 주장한다. 야당 공격이 과한 측면이 있는 건 맞지만, ‘세월호 정국’에서 저급한 국정수행 능력을 드러낸 박근혜정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무기력한 여당의 ‘야당 책임론’은 터무니없다. ‘세월호 정국’을 풀기 위해 진정성을 갖고 야당과 머리를 맞대려 노력한 적이 있기나 한가.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고 밝혀 파장이 인 적이 있다. 당시 야당과 보수세력이 자신을 몰아붙이자 한 말이다. 야당과 진보세력의 강압을 받고 있는 박 대통령의 심정 또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2003년보다 훨씬 엄중하다. 정치인들도 여야를 떠나 공동체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시기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소모적인 공방으로 소일하고 있다. 대안 없이 비판만 하거나, 무작정 대통령을 감싸는 행동은 정치 혐오를 불러올 뿐이다. ‘관피아’ 적폐 해소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면 정치개혁 주장이 다시 제기될 듯하다. 이를 시사하는 이야기가 벌써 항간에 나돈다. “세월호에 정치인들이 타고 있었다고 해도 지금처럼 슬픔과 자괴감이 컸을까.” 김진홍 수석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