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세계로 비유한다면, 전혀 예상 밖에 컴퓨터 회사인 애플이 갑자기 제일 좋은 휴대전화를 발표해 삼성전자가 한 방 먹은 꼴이다. 아니면 삼성전자 스스로는 협조관계라고 여겼던 구글이 말 한마디 없이 애플과 손을 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납치자 문제 재조사 합의(5월 29일)를 고리로 밀월 관계에 들어간 북한과 일본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한국 외교를 두고 하는 비유다. 이 정도면 민간기업 같았으면 줄줄이 문책당할 만한 일이다. 외교적 상처가 크고 국민들도 좀 허탈해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경쟁 상대가 뭘 하고 있었는지 정보전에서 한참 뒤졌고, 북핵 문제를 고리로 공조해온 파트너와 사전협의는커녕 ‘사전통보’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외교부 공식 보도자료에 일본한테 통보받은 시점을 “공식발표 직전”이라고 발표했을까. 통보시점 및 방법, 채널, 통보 내용에 대해선 좀더 규명이 필요하다.
우리의 안일한 외교전은 그 앞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더 생생히 알 수 있다. 북·일 합의 일주일 전인 지난달 22일 외교부 북미국장은 도쿄를 방문해 일본 외무성 북미국장과 북핵 문제를 둘러싼 문제 등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동북아국장도 지난달 15일 일본 외무성의 아시아대양주국장을 만나 양국 현안을 조율했다. 잇따른 고위급 만남에서 우리 정부는 별 낌새를 채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공조’에 실패했다.
외교부가 이렇게 손놓고 당한 것은 최근 활발해지는 주변국들의 움직임을 대수롭지 않게 판단했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최근 외교부 기자실에서는 한 국장급 인사가 북·일 간 및 북·미 간 접촉에 대해 “회담에 나서는 사람들의 급(級)이 중요한 인사가 아닌데 언론이 괜히 무게를 두는 것 같다. 회담에 나서는 이들이 핵심이 아니라 잊혀진 사람들이라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비단 북·일 간 합의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외교는 ‘진의파악 외교’를 하느라 바쁜 인상이다. 주변국들은 대북 접촉 및 미사일방어체제(MD) 문제, 합동 군사훈련 및 방공식별구역 무력화 등의 움직임으로 숨 가쁘게 외교전을 펼치는 반면, 우리는 벌어진 사안에 대처하고 진의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다.
앞으로도 동북아 주변에선 오른손으로는 애인의 팔짱을 끼고, 왼손으로는 뒤따라오는 애인의 연적(戀敵)과 몰래 악수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만의 목표가 없으면 언제든 또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 현 정부가 나름대로 동북아평화협력 구상과 드레스덴 선언을 내놓고 동북아 긴장 완화를 시도했지만 전자는 연성 이슈를 다루는 것이어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안외교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되고 있다. 게다가 후자는 당사자인 북한조차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두 이슈에 진을 빼느라 우리 외교가 길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평가도 나온다.
무엇보다 외교적 파이팅이 부족하고, 긴장감 있게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외교부 사람들은 ‘요즘은 밖에 나가면 한국이 대접 받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세계 11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고 자동으로 외교력이 11위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우리의 위상 변화에 걸맞게 더 치열해지고 날카로워지지 않은 부문이 외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남들이 칼을 가는 동안, 우리는 동맹이라는 양수막만 믿고 순진한 태아마냥 안주했던 게 아닌가 싶다. 외교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다. 더 분발하고 긴장감 있게 일할 때다.
손병호 외교안보국제부차장 bhson@kmib.co.kr
[뉴스룸에서-손병호] 뒤통수 맞은 착한 외교
입력 2014-06-02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