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길] 추억 속 극장 순례

입력 2009-10-06 17:56


한국 최초의 서구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진 것은 1908년의 일이지만, 무대 춤을 목표로 한 본격적인 무대공연 공간이 만들어진 것은 1970년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정면액자무대인 장충동국립극장(1973년), 세종문화회관(1978년), 문예회관(1981년, 현 아르코극장), 리틀엔젤스예술회관(1981년)의 건립은 곧 우리 공연예술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기억 속의 첫 극장은 남산 어린이회관 무지개극장이다. 1970년 육영수 여사의 후원 아래 건립된 어린이회관에는 층별로 음악교실, 무용교실, 과학교실, 도서실, 상담실, 수영장, 극장 등이 있었고 맨 위층에는 한 시간마다 360도 회전하는 전망대가 있어 서울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나를 사로잡은 장소는 무지개극장이었다. '천사의 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비롯한 예술영화 상영과 함께 어린이들의 콩쿠르가 아닌 순수한 의미의 무용발표회를 열던 곳. 무지개극장 때문에 나는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고 발레를 평생의 업으로 하게 됐는지 모를 일이다.

내 마음 속의 두 번째 극장은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이다. 1934년 일본인에 의해 세워져 해방 후 시공관으로 불리다가 1962년 명동국립극장이 되었다. 1972년인가, 그곳에서 본 작품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홍정희 선생이 어머니를 그리며 만든 솔로 작품 '조용한 대답'. 음악은 가브리엘 포레였다. 그 선율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생생하고, 움직임 역시 눈에 선하다.

또 하나 기억나는 공연도 그 즈음 같은 곳에서 열렸는데, 임성남의 창작발레 '오줌싸개의 향연'이었다. 약간 민망한 제목과 달리 에너지가 넘치는 새로운 작품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유니타드(위 아래가 붙은 타이츠)를 입고 사마귀의 습성을 표현한 낯선 동작들은 발레에 대한 환상으로 그득하던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세 번째 극장은 고2때인 1977년, 표현주의 발레의 대가인 쿠르트 요스의 후계자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을 본 남산 국립극장이다. 안무자인 젊은 피나 바우쉬가 희생되는 처녀 역으로 직접 출연했다. 2층 구석진 자리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한동안 감전된 것처럼 감동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계속된 국내외의 극장순례가 가져다 준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은 언제고 나를 성큼 자라게 한 동력이 되었다.

공연예술은 언제나 극장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외국의 예술학교에서는 극장사를 정규 교과과정에 넣을 정도다. 또한 극장과 공연예술 관련학교는 늘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학교에서 예술을 배운 학생들이 다시 지역의 극장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것이 이상적인 방향이다. 그러나 매년 1만2000여명(무용은 2000명)의 예술 관련학과 졸업생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들을 받아줄 자리는 고작 10∼20%에 그친다.

그런 점에서 서울문화재단이 지원하는 '공연장 상주 예술단체 육성 지원 사업'은 반가운 일이다. 예술 관련학과를 졸업한 학생들만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지역 사회와 지역민들의 문화 예술에 대한 욕구를 풀어주는 사랑방이자 교육의 장으로 극장이 존재하고, 예술단체가 활동해야 함을 상기시켜 주는 사업이다.

어려서부터 좋은 공연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교육기회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예술의 가치를 알게 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애착을 갖게 된다. 나아가 스스로 좋은 공연을 선별할 힘을 가지며, 나이가 들면서 더욱 훌륭한 관객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객들로 가득 차는 극장에 나는 가고 싶다.

김순정(성신여대 교수·스포츠레저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