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김경웅] 인도적 문제부터 해결을

입력 2009-08-09 18:17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 김일성 북한 주석이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강조했던 내용이다. 당시는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싸고 위기가 한껏 고조될 때였다. 카터가 북 핵시설 동결과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의사를 받아낸 것은 그때로선 미·북관계의 출발점으로 여겨질 만했다. 더구나 북이 남북 정상회담을 카터를 통해 제의했고, 남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남·북·미의 '삼국지 드라마'는 절정을 향해 갔었다.

그러나 김 주석의 언급은 북한의 핵 개발 과정 분석 결과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북한이 두 차례 핵실험을 마친 지금, 1991년에 나온 남북 비핵화 선언은 사실상 무효화됐다. 남북이 함께 만든 귀중한 합의서 자산이 또 한번 증발해버린 셈이다.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

그로부터 딱 15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이 다시 큰 관심을 모았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깜짝 방문했다는 점 등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에도 미·북 양측이 여러 차례 실무협의를 거쳐 최소한 의제 설정은 해놓고 머리를 맞댔다는 점이다.

미·북관계는 물론 남북대화에서도 여지껏 그래왔다. 양측 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다가도 갈 데까지 가다가는 깜짝 이벤트와 조정기를 거쳐 협상 국면으로 가는 패턴이 되풀이됐다는 얘기다. 이번 클린턴 방북은 비록 인도적인 사안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순위였지만 미국 전직 대통령이 북의 최고위층과 직접 협의를 한 만큼 양측은 상당한 준비를 했고, 앞으로 나름대로 성과가 있으리라는 건 상식에 속한다.

지난 94년 미·북관계 전개 과정과 제네바 협정을 타결했던 것이 타산지석이 될 터이다. 당시 양국은 주고받기식 협상을 마무리했으나 늘 그렇듯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국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미·북 양자 구도에서 경수로 분담금 등 부담만 잔뜩 안았다.

지금은 한·미 양국이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는 설명도 가능하겠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미국이 전략적 구도를 주도하려 하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면밀히 관찰, 경우에 따라선 선제 대응해나갈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남북대화에서 인도적 문제는 늘 좋은 선례를 남겨 왔다. 남북관계가 토라지고 긴장이 됐을 때 적십자 회담이 앞장을 서면서 다른 회담들을 이어가곤 했다. 클린턴 방북의 경우처럼 우리가 뭔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는 걸까.

우리 정부는 억류 근로자와 어선, 어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고, 정부를 믿고 지켜봐달라"고 거듭 밝히고 있다. 북측 역시 미국 여기자들을 돌려보낸 마당에 남측 억류자들이 "잘 있다. 조사 중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 없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진보 성향의 인사들조차 "미국인에게는 관대하고, 북측이 강조해온 '우리 민족끼리'는 뭐냐"하는 식의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남과 북,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동안 남북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고쳐 바로잡자는 데 뭐랄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시간이 길어지고 불신과 갈등이 깊어질 경우 비용과 비효율을 어찌할 것인지, 또 자기부정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남북 조정기 전환에 대비해야

남북은 두 계단을 밟아 통상 1∼2개월 걸리는 조정기와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을 예비해야 하리라고 본다. 10월 초로 알려진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방북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첫 단계는 남북대화가 계속 열려야 한다. 여기서 억류 근로자와 어부 문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문제 등을 일괄 타결지어야 한다. 먼저 북측이 인도적 조치를 취하면서 남북이 동시에 관계 정상화를 위한 수순을 밟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 단계는 당연히 미래지향적이고 실용성 있는 새 남북관계의 종합 청사진을 함께 그리는 자리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남북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할 타이밍이다.

김경웅 민간남북경제협의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