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참 대단한 나라,대한민국
입력 2009-08-09 19:31
배포가 꽤 유한 언론계 선배 한 분이 계신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그 무섭다던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서도 누가 잠을 깨워줘야 일어나고, 주는 밥이 부족하다며 더 달라고 하여 수사관들이 "이런 사람 처음 본다"고 했다는 분이다. 어지간히 큰일을 만나도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6·25동란까지 다 겪은 민족인데 뭐 별일 있겠느냐"면서 여유만만이다.
정말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단련이 돼서인지 웃통 벗고 호랑이에 대들 만큼 국민의 배포가 대단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핵실험을 하고 머리맡에서 미사일을 쏘아대도 우리 국민에겐 강 건너 불일 뿐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우리
북한의 핵실험, 김정일 사후 북한 붕괴 가능성 등 예측불허의 한반도 정세를 놓고 세계 양대 강국(G2)임을 자처하는 미국과 중국이 밀담을 나누고 있는 이때 당사자인 우리는 아웃사이더로 주변만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국이 억류 중인 여기자들의 석방을 명분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을 북한 김정일에게 보내 모종의 빅딜 가능성을 탐색했으리라는 게 상식인데,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 관계가 돈독하니 걱정 말라고 태평가만 부르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미·북 간에 빅딜이 성사될 경우 우리는 봉사 기름값 대듯 빅딜의 비용이나 무는 일은 없을지 모르겠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당장 수교도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게 일반적 인식인데 정부는 대북 강경책에 올인하는 게 현명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북한이 미국 기자들은 풀어주면서 남한 사람들은 계속 잡아놓고 있는 소행을 도저히 이해 못하겠지만, 우리 국민의 석방을 클린턴을 통해 촉구해야 하는 우리 처지도 참 딱하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 불법 시비를 일으키면서까지 미디어법을 강행 처리하여 나라를 온통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또 그 와중에도 친이명박계니 친박근혜계니 패를 갈라 당권을 놓고 조기 전당대회 여부로 기싸움을 하는가 하면, 10월의 재·보선을 놓고도 계파와 지도자 간 신경전에 여념이 없다. 곧 있을 개각에서 당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키라고 밥그릇을 챙기는가 하면, 당 인사들은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자가발전도 불사한다.
야당인 민주당이 원내에서의 수적 한계 때문에 장외에서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걸 이해 못할 바 아니나, 그 수위와 시기가 적정한지 의문이다. 급류 속의 한반도 정세도 그러려니와 쌍용차 사태를 비롯하여 서민 생계와 예산 문제 등 야당이 챙기고 감시해야 할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미디어법에 올인하는 게 집권대체세력으로서 옳은 길인지 모르겠다. 의원직 사퇴서를 내놓고 검찰총장 후보 청문회 등 국회 활동은 어떻게 할 것이며, 의원의 세비와 보좌진의 봉급 등은 어떻게 할 것이고, 또 국회의원 재·보선엔 어떻게 임할 것인가. 민주당의 미디어법 투쟁은 지금까지의 활동으로도 충분히 뜻을 폈다. 그리고 민주당은 헌법재판소에 미디어법 표결의 무효를 청구해 놓은 상태다. 미디어법이 무효가 될 때까지 장외투쟁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헌재의 심판에 맡기고 적당한 명분과 시기를 선택하여 장내로 돌아와 국정을 챙기는 게 국민을 더 위하는 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무사태평인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그 모양이니 국민도 북한이 핵실험을 하든, 세계 경제가 가라앉든 알 바 없다. 노사는 쌍용차 사태에서 보듯 같이 죽자 식 사투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눈만 뜨면 '좌익 빨갱이' '보수꼴통'으로 나뉘어 삿대질이다. 가진 자는 없는 자를 비웃고, 없는 자는 가진 자를 증오한다.
대한민국, 정말 대단한 나라다. 안보 경제 등 온갖 불확실성 속에서도 위정자들과 국민이 함께 무사태평인 게 대단하고, 그 혼란 속에서도 나라가 지탱되는 게 기적이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한반도 정세가 삐끗할 경우 임진왜란, 병자호란보다 덜하지 않은 불행한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위정자들도, 국민 모두도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
전무이사 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