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유토피아적 망상… ‘거대한 전환’
입력 2009-07-10 18:01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도서출판 길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로 20세기 경제사상사에서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긴 칼 폴라니(1886∼1964)의 이 저서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매키버는 "이 분야 대부분의 책들을 낡아서 쓸모 없거나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만하다"고 극찬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폴라니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출생연도나 활동시기로 볼 때는 파레토나 케인스, 하이에크 사이 어딘가에 이 거장의 이론이 등장할 법한데, 국내 웬만한 경제사상사 서적에는 아예 이름이 빠져 있거나 간략하게 언급되는 정도에 머물러왔다. 2000∼2007년 '칼 폴라니'를 직접 인용한 칼럼은 중앙일간지를 통틀어 두세 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2008년 하반기부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이 잊혀졌던 경제학자를 급격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해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일본에서도 '폴라니 다시보기'가 거의 열풍에 가깝다고 전해진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파고가 자본주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공리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미 60여년 전에 이 문제를 그 어떤 경제학자보다 깊이 천착했던 폴라니가 당대보다 현재에 이르러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양상이다.
무덤에서 부활한 이 경제학자의 대표 저작인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영문판이 첫 완역 출간됐다. 시장경제를 둘러싼 좌·우의 교조주의적 경제결정론을 모두 비판적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폴라니의 이 고전은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그의 나이 57세 때 출간됐다. 폴라니는 30년대 대공황의 발생과 금본위제의 붕괴, 파시즘의 등장 등을 지켜보면서 그 지구적 '거대한 전환'의 과정과 비극의 기원을 '시장경제 유토피아'의 출현에서 찾았다.
폴라니는 히틀러 집권 뒤 영국으로 망명해 옥스퍼드대에서 일하면서 "인간들을 통째로 갈아서 무차별의 떼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사탄의 맷돌"에 영국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짓이겨지는 현실을 접하고 분노했다. 그가 보기에 시장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허울을 씌워 개인의 인격과 공동체의 심성을 파괴한다는 데 있었다. 이는 영혼과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하고 기능적인 수나사·암나사 정도로 여기는 파시즘의 정신적 기원과도 맞닿아 있다는 게 폴라니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결코 시장경제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여기거나 철폐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시장경제가 철저한 '자기조정' 능력을 갖고 있다는 유토피아적 믿음, 나아가 시장 제도라는 '자연법칙'에 인간과 사회가 종속돼 있다는 관념이 근거 없는 미신이자 주술에 불과하다는 점에 방점을 뒀다. 그는 개인적 이윤 동기로 작동하는 시장이 제한 없이 풀려날 경우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급속도로 파괴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념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그는 국가 계획의 사회주의와 시장 방임주의를 둘 다 배격했다.
폴라니의 논지는 '시장경제의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적절한 국가 개입과 규제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완전한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는" 일종의 상상이요 허구라고 주장한다. 그 같은 유토피아적 망상이 현실화될 경우 도덕과 질서에 엄청난 파국을 맞이하게 될 시민과 정당, 심지어 기업들마저도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균형과 규제를 요구하며 끊임없이 저항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 만능 자본주의는 자기조정의 신화를 억지로 밀어붙이는 움직임과, 이를 못 견뎌 하는 아주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저항이 충돌하는 '이중적 운동'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게 폴라니의 분석이다. 결국 그는 유토피아 주술에 길들여지지 않고 이중적 운동이라는 역동을 만들어 낸 '사회'라는 실체, 그리고 '자유'의 실체를 발견해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또 다른 '거대한 전환'의 시점에서 폴라니는 우리에게 너무 늦기 전에 이웃과 자연을 바로 보고, 시장의 종속물로서가 아닌 사회의 실체와 공동체적 연대를 복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한다.
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