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In&Out] 얼굴없이 살아온 40년… 시인 김수영 미망인 김현경

입력 2009-06-18 22:50


“김수영, 그와 사는 동안 가슴이 꽉 차 있었어”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다.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이지만 요즘 그에게 이 사자성어만큼 뇌리에 쏙쏙 들어오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한국현대시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수영 시인(1921∼1968)의 미망인 김현경(82) 여사. 그가 시인 사후 40여년 만에 입을 열었다. 일간지와는 첫 인터뷰다.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청덕동 물푸레 마을의 한 아파트를 찾아간 지난 16일은 공교롭게도 김 시인이 41년 전 귀갓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기일(忌日)이었다. 그는 문을 따주면서 "인근 오포읍에서 이사온 지 일주일 밖에 안돼 어수선하다"고 말을 건넸지만 50여평 집안 구석구석엔 웬만한 갤러리를 능가할 만큼 수준높은 그림과 조각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건 화가 윤석남의 초기작이고 이건 닥종이 작가 김영희의 작품이지. 난 사실주의 작품보다는 모던하고 초현실주의적인 게 끌려. 김 시인이 생전에 나와 주고 받던 말이 있어. '에스프리 누보!'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이지."

그는 알고 보니 화단 일각에서 이름이 알려진 안목 높은 수집가이자 실내 디자이너였다. 5척 단구(短軀)에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그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다. 비상한 기억력이며 조리 있는 말투에서 지성과 열정이 느껴졌다. "얼마 전, '김수영 육필시고전집'이 나왔잖아. 내가 소장하고 있던 육필 원고를 출판사측에 다 내주었어. 연전에 시누이인 수명(초대 현대문학 편집장)이가 육필시고전집을 낼 계획이라는 소식에 접하고 기왕이면 내가 갖고 있던 것을 내놔야할 때라고 생각했지. 사실 수명이가 갖고 있는 건 얼마 되지 않아."

관에 하이데거의 '릴케론' 넣어줘

말투에 어떤 도그마도 없는 자유분방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푸른 하늘을' 중)라고 노래했던 김수영 시인의 미망인다운 기질이 아닐 수 없다.

"이 집은 전세로 얻은 건데 사연이 좀 있어. 내가 충북 보은에서 좀 살았잖아. 그러니까 1981년에 내려가서 13년쯤 살았을 거야. 당시 에밀레박물관장 조자룡씨가 보은 일대 한옥을 사들여 민화박물관을 만들면서 나를 스탭으로 끌어들였지. 민화에 대한 내 안목을 알아본 것인데 암튼 그때 내가 보은에다 집 한 채를 사서 거주했더랬어. 근데 내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김 시인 유품들을 따로 정리해 서재 비슷하게 만들어놓고 자물쇠를 채워놓았지. 처음엔 관리인을 두었는데 아주 빈 집이 된 게 작년이야. 그때부터 도둑이 들어 책이며 유품이 없어지기 시작했어. 벌써 다섯 차례나 도둑을 맞았는걸."

기왕에 내려간 보은에 김수영문학관을 만들어보자는 꿈은 그래서 접었다고 했다. 사실 보은과 김수영은 아무 연고도 없어 보은군에 자금 지원을 요청할 명분도 약했다. "얼마 전 내려가보니 또 도둑이 들었어. 이번에는 큰 궤짝에 보관해온 하이데거 전집과 런던에서 발행한 50년대 '파르티잔 리뷰'가 몽땅 사라지고 없더군."

그는 보은에서 수거해온 자물쇠를 보여주었다. 망치로 깬 듯 자물쇠 한 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김 시인은 하이데거를 참 좋아해 열심히 읽었지. 오죽했으면 내가 관에 하이데거의 '릴케론'을 넣어주었을까. 지금도 어제일처럼 생각 나. 내가 바느질 솜씨가 좋아 옷을 만들어 생활비를 마련하곤 했는데 한번은 돈이 생겨 충무로로 산책을 나갔다가 일어전문책방에서 하이데거 전집을 샀더랬어. 내가 열권, 그 사람이 열 권, 그렇게 품에 안고 온 전집인데…. 이 글을 읽고 도둑님이 그 책만큼은 꼭 돌려주길 바래. 내가 이 물건들을 지금껏 버리지 않고 보관해온 건 문학관을 만들어보잔 것이고 그래서 보은에 그냥 놔둘 수 없어 일단 안전하게 보관이라도 하자며 큰 아파트를 전세 얻은 것이야."

그는 김 시인과 함께 가장 행복했던 때로 마포 시절을 꼽았다. 서울 마포구 구수동 42번지 2호. 지금은 풍림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그땐 한강이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배기였다. 반대로 가장 가슴 아팠던 때는 부산 시절이다. "6·25 지나고 환도 후에 우리가 재결합했잖아. 그이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부산에 자리를 잡았는데 하수구 옆 하꼬방 집을 빌려 사는거야. 냄새가 말도 못해. 그곳에 8남매가 시어머니랑 살고 있었지. 김 시인을 맏이로 남동생 수성 수광 수경 수환, 그리고 여동생 수명 수연 성자 이렇게 8남매였지. 그래서 내가 취직이라도 해야겠기에 처녀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종구를 찾아갔지. 그이는 김수영과 선린상고 동창인데 도쿄 유학 시절에 함께 하숙을 하기도 할 만큼 절친했어. 이종구는 내 부친의 첩이 밖에서 낳은 아들인데 어렸을 때부터 아저씨라고 불렀지. 그런데 그이가 날 보더니 놔주지 않는거야.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거야. 할 수 없이 눌러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아침, 밥상을 차려 방에 들여놓을 때 김 시인이 딱 나타난 거야. 이종구와 나와 김 시인 셋이서 세 시간은 족히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어. 밥알이 말라서 굴러떨어지더군. 딴 사람 같으면 두둘겨 팼을 텐데. 나중에 '같이 가자' 그 한 마디 뿐이었지. 내가 '먼저 가 계세요'라고 했더니 '알았어'하고 일어섰는데,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2년을 더 살다가 김 시인과 재결합한 거야." 인생에서 가장 아픈 이야기일 텐데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

꿈같이 행복했던 마포 구수동 시절

이종구(1990년 작고)는 김현경에게 김 시인을 소개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43년 당시 서울진명고녀 2학년이던 김현경은 도쿄의 김수영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게 이종구의 주선이었다. 이듬해 여름 김수영은 불쑥 김현경을 찾아왔고 둘은 여섯 살 나이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강백사장으로 데이트를 나갈 만큼 서로에게 빠져 있었다. "내가 쌍가마야. 운명인 게지."

애틋하고도 뼈저린 시절을 뒤로 하고 재결합한 두 사람은 서울 성북동을 거쳐 마포에 정착한다. "성북동집은 원래 거부(巨富) 백낙승의 별장이었는데 내가 그곳에 세를 얻었어. 정원 한쪽에 비가 오면 물줄기가 폭포 되어 떨어지는 절벽이 있었지. 얼마나 시끄러웠겠어. 그 양반은 무조건 소음이 없어야 사는데. 암튼 '폭포'라는 시는 그 집에서 씌여졌지."

김수영은 작고 직전,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에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마포에서 동숭동까지 버스로 출퇴근을 했는데 강의가 있는 날은 텅빈 마포집이 싫어 그는 퇴근 시간에 맞춰서 동숭동까지 마중을 갔다고 했다. "서울대 마로니에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가면 첫 마디는 '뭐하러 나왔어'라고 구박을 주었지만 속내는 싫은 눈치가 아니었지. 근데 그 양반이 주사가 심했어. 이종구 생각이 나면 날 때린 적도 있지. 그럴 땐 시퍼렇게 멍들 만큼 얻어맞을 수밖에. 그래도 그때뿐이야. 마포에서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냈어. 그이가 번역을 하면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집안을 서성거리면 내가 다 뿌듯해 지곤 했지. 무조건 같이 있어야 했어. 공존해야 했지. 난 그 양반과 같이 사는 동안에 가슴이 꽉 차 있었어. 그게 소울(영혼)아니겠어? 두둘겨 맞아도 소울인 게지."

그가 김수영 시인 사후 40년 동안 얼굴 없는 미망인으로 살아온 데는 이토록 아픈 추억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김수영 전집이든 시집이든 유고문집이 발간될 때마다 저작권은 시인의 여동생인 수명씨 앞으로 명기되었다. 그는 수명씨의 이름 뒤에 숨어있는 존재였다. 그토록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그가 어쩌면 무덤에까지 갖고 갈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은 건 생의 마지막 뒤안길에 김수영 시인의 영혼이 살아 숨쉬는 문학관을 만들어야겠다는 너무도 자발적인 의지 때문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여기 저기 지자체에서 문학관을 유치한다고 난리들이잖아. 그렇게 판에 박힌 거 말고 정말로 영혼이 깃든 문학관을 만들고 싶어. 내 생각에 마포가 가장 적합한 것 같아.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 김 시인의 저작들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겠지."

정철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