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바로 글바로] ‘의’의 변신술
입력 2009-06-12 17:58
짱구가 군대에 들어갔다. 고참인 맹구가 괴롭히는 바람에 생활이 구차하다. 짱구가 꾀를 냈다. 어느 날 예쁜 여자 사진을 맹구에게 보여주었다. "제 여동생의 사진입니다."
일이 잘 풀려서 맹구는 짱구 여동생과 편지를 주고받고, 그 사이 짱구는 팔자가 폈다. 맹구가 그 여자를 만났는데, 인물이 사진과 영 딴판이다. "동생 사진이라더니, 어찌 된 거야." "동생의 사진 맞는데요. 동생이 찍은 사진."
'동생의 사진'은 동생이 찍은 사진, 동생을 찍은 사진, 동생이 갖고 있는 사진 등 여러 의미를 지닌다. 그래도 우리는 일상에서 의미의 혼선을 빚지 않고 잘 사용한다. 짱구처럼 억지를 부린다면 할 수 없지만 대개는 상식이 통하는 선에서 '의'를 사용하고, 그 뜻을 공유한다.
'의'를 쓰면 표현이 간결해진다.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일'은 간단히 '전통문화의 보존'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비추어 주시는 영광의 빛줄기'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줄기'로 줄일 만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줄기'는 '의'가 연속으로 나와 좀 부담스럽다. 같은 격조사가 연이어 나올 때 느끼는 음의 충돌현상, 그리고 일본어투에 가깝다는 점 등 때문에 그리 잘 쓰이지는 않는다.
'의'가 붙은 말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을 통틀어 관형어라 한다. 뒤에 나오는 명사를 꾸민다. '아름다운 꽃'에서 '아름다운'이 곧 관형어다. '의'가 두 번 나오면 껄끄럽듯이 이들 관형어도 연이어 나오면 흐름이 좋지 않다.
'너른 대지 앞에 펼쳐진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서 '너른 대지 앞에 펼쳐진'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은 절로 된 관형어이다. 아무래도 읽어 내려가기가 부담스럽다.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필 같은 글에서는 중간에 쉼표를 넣어 둘 사이를 구분해 준다. 하지만 기사체나 구어체 문장은 이런 방식의 쉼표에 거부감을 보인다. 빨리 읽어 내려가려는데 중간에서 흐름을 끊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표현을 달리한다. '너른 대지 앞에 펼쳐진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가 그 중 한 방식이다.
이병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