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바로 글바로] 유언 글 왜 고쳤을까
입력 2009-05-29 17:53
한글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작성한 뒤 저장 버튼을 누르면 그 문서의 첫 문장이 파일명을 적는 창에 뜬다. 지우지 않고 바로 저장하면 그 문장 자체가 파일명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컴퓨터에 남긴 유서의 파일명이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파일명이 유서 내용과 조금 다르다. 유서 내용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이다. '여러 사람의 고통'이라고 쓴 뒤 저장했다가, 다시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으로 수정했음을 알 수 있다. 왜 이처럼 고쳤을까.
수정한 글 가운데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크다'를 보자. 주격조사 '이'가 겹쳐 있다. 수정하기 전의 글 '여러 사람의 고통이 크다'와 비교하면 좀 늘어진다. 즉 이 표현만 따로 떼고 보면 이전 문장이 훨씬 낫다. 달변가이자 달필가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 일부러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수정하기 전의 글을 다시 보자.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서두인 '나로 말미암아'가 부사어라는 점이다. 부사어는 용언, 즉 동사나 형용사와 잘 결합한다. '학교에서 공부는 당연하다'가 어색한 이유는 부사어 '학교에서'와 호응되는 용언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건 당연하다'처럼 '공부하다'라는 용언을 만들어 주어야 짝이 맞는다.
따라서 유서도 '나로 말미암아'로 글을 시작했으니 그와 짝을 이루는 용언을 내세워야 한다. 수정 전의 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에는 그런 용언이 없다. 마지막에 나오는 '크다'와 맺어 '나로 말미암아…크다'로 해 본들 의미 결합이 안 된다.
이와 달리 수정한 문장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은 '나로 말미암아…받다'의 호응관계가 부드럽다. '부사어+용언'의 바람직한 형태를 이룬 것이다. 글이 늘어짐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이 굳이 표현을 바꾼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가시기 직전에 정리한 14줄 단문들이 하나하나 경구 같다. 이처럼 어법까지 세세히 신경 쓴 결과다.
이병갑 교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