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오인숙] 파란 카네이션 보셨나요
입력 2009-05-13 21:19
어느 해 스승의 날. 파란 카네이션 한 송이를 선물로 받았다. 서툰 가위질과 풀자국이 묻은 색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큰집에 얹혀사는 아이가 준 선물이었다. 한방을 쓰는 사촌형에게 선인장 가시로 발바닥이 찔리기도 한다는 그 아이가 스승의 날 전날 밤, 형이 깰까 봐 살금살금 일어나 겨우 찾아낸 색종이 한 장이 파란색이었다. 아이는 선생님께 드릴 파란색 카네이션을 가슴 설레며 밤 늦도록 만들었다고 일기장에 썼다.
그 파란 카네이션은 나로 하여금 아이들의 선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뜨게 했다. "정말 요즘 아이들에겐 소망이 없다" "아이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아이들이 무섭다"는 교사들에게 내 속의 파란 카네이션은 "아이들 속에 감추어진 사랑의 보물을 찾아내어 보라"고 말하게 했다.
교직 버리지 않게 한 원동력
스스로에겐 아이들에게 긍정적 기대를 해야 한다는 다짐을 주기도 했다. 힘들고 지쳐 교직을 버리고 싶을 때 꿋꿋이 이어지는 아이들과의 정을 생각나게 했고 나를 위해 밤새워 파란 카네이션을 만드는 아이가 또 어딘가에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파란 카네이션을 받던 날, 아이는 내 가슴에 큐피드의 화살처럼 꽂힌 카네이션을 마냥 행복한 눈길로 바라봤다. 행복한 눈길을 보며 나도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고 아이들이 곧 교사의 행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교육청에서 몇 차례 공문이 왔다. 꽃이나 선물을 받지 않겠다는 가정통신문을 학생들의 가정에 보내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교사는 파란 카네이션에 연연해하며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느 중학교에서 스승의 날 기념식을 진행할 때 교장이 하던 훈화를 멈출 정도로 학생들이 떠들어 댔다. 보다 못한 어느 교사가 한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고 아이들이 들이대는 휴대전화에 사진을 찍히고 고발당했다. 이런 세대를 살면서도 교사들은 파란 카네이션을 찾는지도 모른다.
파란 카네이션이 아니더라도, 비록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플라스틱 카네이션이라도 잠시 아이들의 눈길이 머물고 용돈을 털어 사는 그 마음이라도 받고 싶은 것이 교사다. 그것은 이 시대에 존경받지 못하는 교사로 살아가는 자신을 부추기는 마지막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감사 표시를 할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고 받는 데만 길들여진 아이들이, 교사들에게 자장면을 사달라고 조르고 피자 한 판을 사달라고 조른다. 응하지 않는 교사는 쪼잔한 교사로 아이들에게 왕따 당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카네이션의 의미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섬김과 사제지간의 정을 이어주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스승의 날이 오면 교실을 뒤져서 교사가 받은 선물이 삼만원 이상이면 뇌물인데 이 케이크가 3만원이 넘지 않겠느냐고 들이대는 세태. 스승의 날 괴롭힘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승의 날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교사들이 파란 카네이션조차 포기할까 두렵다. 교사가 아이들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사랑을 포기하면 아이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로 자라게 된다.
제자에 거는 기대 표징 있어야
성경 속 예수님 제자들은 사회적으로 부정적 기대를 갖게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긍정적인 기대를 갖고 계셨다. 고기 잡는 어부를 사람 낚는 어부로 기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잠재력을 발휘하여 세상바다에서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교사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의 파란 카네이션은 아이들의 꿈과 사랑과 삶이 직결되어 있다.
이번 스승의 날에는 이 시대의 아이들에 대하여 절망을 느끼는 교사들의 가슴에 파란 카네이션이 살아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교사로 부르신 부름에 사랑의 소명감으로 응답하는 교사들로 이 땅의 아이들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랐으면 좋겠다.
오인숙 인천영화초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