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길―김기태] 책 읽는 사회 만들기

입력 2009-02-24 19:26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언제쯤 자기 직업에 대한 포부를 확정하게 되는 걸까. 아마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는 동안 자기적성이나 가치관, 시대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수시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직업 중에서 유독 장래포부의 대상에서 제외되다시피한 것 중에 하나가 책 만드는 일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숫자나 글자를 깨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시로 만나는 것이 책이다. 대통령도, 장관도, 법관도, 의사도, 교사도, 학생도 책을 통해 학습하고 숱한 간접경험을 쌓는다. 그래서 출판의 기능을 '문화가치로서의 지식과 정보를 창조하고 전승하며 보존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지,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대학과 전공 중에 '출판'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현실, 그리고 각 분야에서 그토록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함에도 정작 책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예우는 처진다.

자녀들더러 TV 그만 보고 책 좀 읽으라고 다그치는 부모들도 훗날 다른 집 아이는 방송사에 취업했는데 자기 자녀가 출판사에 들어간다고 하면 과연 기꺼워할까. 비단 책 만드는 일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만드는 사람 따로 있고 즐기는 사람 따로 있다는 편견은 우리 사회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값비싼 비용을 흔쾌히 지불하는 가장이 자기 자녀에게 요리사를 권하지 않으며, 좋은 쌀 유기농 채소 운운하면서 식탁에 오를 밥과 반찬을 걱정하는 주부도 자기 자녀에게 훌륭한 농부가 될 것을 권하지 않는다. 남의 아이들이 자라서 그런 일을 할망정 자기 자식만큼은 훨씬 고상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생각은 없다. 출판편집자를 거쳐 대학에서 책 읽는 일과 책 만드는 일을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지만, 과거에는 장래포부는커녕 이 방면으로 진출하는 단계에서도 많이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 탓이라고만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풍토가 책 만드는 직업을 신성하게 여긴다거나 고도의 전문직으로 인정해줌으로써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늦게나마 나의 길을 찾았고, 또한 늦게나마 나와 같은 길을 가려고 마음 먹은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 그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사려 깊게 가르치려고 애쓰지만 간혹 그들이 다른 직업과의 비교 끝에 상대적 빈곤감을 느껴 흔들릴 때면 그들과 함께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들이 마침내 출판계로 진출해 자기 손으로 만든 첫 작품을 들고 찾아와 기쁜 웃음을 전할 때 나 역시 한없는 보람을 느낀다.

그 동안 나의 유혹(?)에 빠져 장밋빛으로 포장된 희망을 끌어안고 책 만드는 일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많지만, 우리 출판계의 앞날은 여전히 걱정스럽다. 아직도 책 만드는 일이란 게 이 땅의 청소년들이 장래포부로 여기기엔 부족한 분야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 읽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책 만드는 이들에게 남다른 보람을 선사해 주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김기태 세명대 교수 미디어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