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캐릭터·게임, ‘성인 팬덤 경제’가 열린다…2D가 바꾼 소비 지도

입력 2025-12-14 07:01
스트레이 키즈 멤버들을 모티브로 탄생한 동물 캐릭터 스키주(아래쪽)가 영화 '주토피아 2'에 깜짝 등장한다.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올해 한국 영화계의 화두였던 애니메이션이 스크린을 넘어 유통 산업 전반의 핵심 전략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침체됐던 영화 시장이 일본 및 미국 애니메이션의 연이은 흥행에 힘입어 되찾은 활기가 빠르게 확산하는 양상이다.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라부부·산리오 등 인기 캐릭터와 게임 콘텐츠 등 과거 일부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2D 기반 팬덤이 유통업계 전반에서 ‘브랜드 경험 확장’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어린이용 아니다
유통가 장악한 성인 팬덤의 힘

한때 ‘아이들이나 보는 만화’로 치부되던 애니메이션이 20~40대 성인층의 압도적인 소비력과 함께 강력한 팬덤 경제의 중심에 섰다. 성인의 N차 관람과 굿즈 구매, 세계관 몰입형 소비가 구매 동력이 됐다. 지난달 개봉한 디즈니의 ‘주토피아2’는 올해 국내 개봉작 중 가장 빠른 속도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누적 566만 관객을 기록하며 올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이 같은 팬덤의 확산은 가장 먼저 팝업스토어 시장을 달궜다. 디즈니코리아는 ‘주토피아2’ 개봉 직전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영화 세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피규어·키링 등 기본 굿즈와 인기 아이돌 그룹 스트레이키즈와의 협업 상품을 선보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어 연말을 맞아 ‘메리 주토피아(Merry Zootopia): 주토피아2 홀리데이 마켓’을 더현대 서울을 시작으로 대구(6일)·판교(12일)에도 열었다.

이 같은 흐름은 유통업계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포켓몬’ 팝업스토어를 3년째 운영 중이다. 올해 초에는 ‘포켓몬’ 팝업 확대 운영만으로 행사 매출이 전년 대비 배 가까이 증가했다. 더현대 서울 ‘점프샵’ 팝업에는 ‘원피스’ ‘하이큐’ ‘주술회전’ 등 인기 만화 지식재산권(IP) 굿즈를 구매하려는 방문객이 하루 4000명 이상 몰렸다.

식품·외식업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농심은 지난 10일부터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속 가상의 컵라면(신라면 햄버거컵·슈퍼스타컵·스파이시퀸컵)을 그대로 실물화해 판매하며 IP 기반 제품 개발의 새 성공 사례를 만들었다. 농심은 기존 케데헌 신라면·새우깡 등 협업 패키지로 ‘2025 대한민국패키지디자인대전’ 대상을 수상했다.

케데헌 협업 제품. 농심 제공


“좋은 기분이 소비를 부른다”
2D 캐릭터가 이끄는 ‘필코노미’

이모티콘·캐릭터 등도 2D 기반 열풍을 이끌었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엔 가격이나 기능보다 감정 만족을 중시하는 ‘필코노미’(Feel+Economy) 흐름이 자리한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이 제시한 이 개념은 합리성 중심의 소비에서 벗어나 편안함이나 행복감 같은 감점을 우선하는 소비 행태를 의미한다. 불확실성이 큰 사회 분위기 속에서 MZ세대를 중심으로 심리적 위안을 주는 콘텐츠 소비가 자연스럽게 확대된 것이다.

올해 상반기 팝업스토어의 21.8%가 애니·캐릭터 IP 기반일 만큼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안거나 쓰다듬을 수 있는 촉각형 상품이 ‘힐링 아이템’으로 부상 중이다. 대표 사례가 라인프렌즈 ‘브라운’이다. 브라운 탄생 15주년을 맞아 내년 1월까지 서울 중구 명동에서 열리는 ‘허그브라운 하우스’에서는 브라운 후드 담요·키링 등 따뜻한 감성을 자극하는 상품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또 렉토·미스터마리아·로파서울·오시토이 등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브라운의 감성적 세계관을 일상 전반으로 확장했다.

짧은 팔을 벌리고 “나 안아…”라고 말하는 밈으로 주목받은 인기 캐릭터 ‘가나디’ 역시 감정 소비 트렌드의 대표 사례다. 카카오 이모티콘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가나디는 지난 3일부터 라인프렌즈 스퀘어 성수에서 ‘천사vs악마 가나디’ 팝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0월 편의점 CU에서 선보인 가나디 협업 음료(바나나우유·망고·자몽 드링크) 역시 연이어 품절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유명 캐릭터와의 협업 대신 자체 IP를 키우는 움직임도 확산하고 있다. 할리스는 지난 9월 브랜드 마스코트 ‘할리베어’를 공개한 뒤 매장 인테리어·메뉴 디자인·굿즈 전반에 캐릭터를 적용하며 브랜드 경험을 강화하고 있다. 삼양식품도 불닭볶음면 캐릭터 ‘호치’를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등 브랜드 강화에 나섰다.

팬덤이 키운 서브컬처 시장
유통업계 새로운 ‘황금알’

과거 비주류로 분류되던 서브컬처·‘덕질’ 시장은 이제 전 세계 유통 산업의 성장 엔진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넥슨 ‘블루 아카이브’와 GS25가 협업한 빵은 포장지만 바꿨는데도 47일 만에 200만개 이상 판매됐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GS25는 올해 하반기 블루 아카이브와 두 번째 협업을 진행할 상품을 선보였다. 삼성전자의 S24 울트라와 블루 아카이브가 협업한 액세서리 2000개도 1분 만에 완판됐다.

해외에선 이미 서브컬처 시장이 거대한 경제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이 대표적이다. 일본 서브컬처 전문 분석기관 ‘오시카츠소우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서브컬처 게임 시장은 3조5000억엔(약 33조원) 규모에 달한다. 일본의 완구 시장은 약 10조4500억원이다. 이 중 캐릭터 키링 시장은 4290억원 규모로 전년 대비 115.3% 성장했다. 편의점 만화 인쇄 서비스·캐릭터 커스텀 프린터 등 팬덤 인프라가 촘촘하게 구축돼 있다. 일본 이온은행은 서브컬처 팬 전용 대출(최대 700만엔)까지 제공한다.

중국 베이징 팝마트 매장의 라부부 굿즈들. 뉴시스

중국은 인공지능(AI) 생성 콘텐츠·메타버스·버추얼 아이돌 산업이 시장을 이끌고 있다. 중국의 버추얼 아이돌 뤄톈이는 광고 모델, 라이브 공연, 굿즈 판매 등을 통해 올해 이미 매출 8억5000만달러(약 1조2500억원)를 기록했다.

삼정KPMG경제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최근 급증하는 비주류 콘텐츠 인기를 ‘롱테일 법칙’으로 설명했다. 기존 주목받지 못한 다양한 소수의 상품군이 더욱 큰 가치를 창출하는 현상이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팬덤 소비는 단순히 ‘좋아서 사는 것’을 넘어 자기표현이자 소속감의 소비”라며 “이런 심리적 요인이 결합되면서 굿즈나 협업 상품이 일반 마케팅보다 훨씬 빠르고 크게 반응을 얻는 구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