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여사에게 공천을 청탁한 혐의를 받는 김상민 전 검사의 재판에서 이우환 화백 그림 ‘점으로부터 No.800298’의 진위 여부가 미궁에 빠져들고 있다. 민간 감정 기관 두 곳의 결론은 진품과 가품으로 엇갈렸는데, 재판부가 감정을 의뢰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마저 ‘감정 불가’라고 회신을 해왔기 때문이다.
11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과수는 법원의 이 화백 그림에 대한 진위 감정 요청에 대해 지난 9일 ‘감정대상과 진품 둘 다 실물을 제출하지 않아 감정이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답변을 보냈다. 미술품 감정을 하려면 진위 판단의 기준이 될 작가의 다른 진품과 감정물의 실물이 모두 필요한데, 재판부가 이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현복)는 지난달 21일 김 전 검사 측 요청에 따라 김건희 특검이 압수한 이 화백 그림의 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했다. 김 전 검사 측은 “특검이 감정대상물을 증거물로 제출하지 않아 국과수에 낼 수 없고, 개인에 불과한 피고인으로서는 이 화백의 진품도 대조물로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 전 검사 측은 대신 2016년 이 화백 작품의위작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국과수가 내놓은 감정 결과를 대조물로 활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국과수는 “국과수 미술품 감정은 감정물과 대조물 모두 실물로 한다”며 “2016년 이 화백 위작 사건 관련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대조물로 한 감정은 불가하다”고 회신했다. 그러면서 “본 사건의 감정을 위해 감정물과 대조물 실물 확보 후에 협의해달라”고 밝혔다.
김 전 검사 측은 감정촉탁서에서 진품 제작 연대인 1980년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됐으나 이후 생산이 중단된 ‘납’ 성분이 감정물에 존재하는지 살펴달라고 요청했다. 반대로 진품 제작 시점에는 사용되지 않은 현대 안료가 발견되는지 봐달라고 했다. 캔버스를 나무 틀에 고정하는 ‘타카’(고정용 못)가 1980년대가 아닌 1990년대 이후 생산된 규격인지 여부 등도 포함됐다.
다만 국과수가 감정 불가로 회신하면서 내년 1월 중순 변론을 종결하려던 재판부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국과수는 “미술품 감정은 여타 감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량의 소요시간을 요한다”고 밝혔다. 감정물·대조물의 실물을 제출하더라도 감정 결과가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국과수가 감정 도중 손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손상동의서를 제출해달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특검이 앞서 감정을 의뢰했던 민간 기관 2곳의 판단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지난 8월 해당 작품이 진품이라는 결론을 냈다. 센터는 작품 속 서명이 이우환 작가의 서명과 일치한다는 점, 작품 속 점을 구성하는 ‘피그먼트’(안료)의 재질과 농도, 그림의 형태나 전개 방식이 이 화백이 비슷한 시기 그린 작품들과 일치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작품에 박힌 못의 산화 정도나 캔버스의 마모도 등을 고려했을 때 제작 추정 시기가 자연스럽다는 점도 제시했다.
반면 한국화랑협회는 위품 결론을 냈다. 협회는 작품 서명에 사용된 안료가 채도 높은 주황색 계열로, 이 화백이 서명에 즐겨 쓴 안료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림 표면에 유리 조각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관찰된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과거 위작 사례를 보면 안료에 유리가루를 혼합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었는데 유사한 특징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협회는 대만 경매에서 그림이 이 화백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낮은 가격(2022년 환율 기준 2863만7400원)에 낙찰된 것에 대해서도 “진위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다.
특검과 김 전 검사 측이 진위 공방을 벌이는 것은 그림의 가액이 처벌 수위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전 검사 측은 진품인 줄 알고 속아서 샀기 때문에 평가액이 청탁방지법 위반 기준액인 ‘1회 100만원, 매 회계연도 300만원 이하’보다 적다고 주장 중이다. 다만 법조계에서는 그림의 실제 가격과는 별개로 구입 가액(1억4000만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재경법원 부장판사는 “준 사람, 받은 사람 모두 약 1억원을 그림의 가치로 인식했다면 이를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준식 기자 semip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