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마련된 정부의 약가 제도 개선 방안은 희귀·중증질환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환자와 전문가들은 당장 내년 하반기부터 시작될 ‘희귀질환 치료제의 100일 내 신속 등재’와 2027년으로 예정된 비용 효과성 평가 잣대인 ‘ICER 값의 적정 수준 상향’ 등 주요 제도의 꼼꼼한 설계가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실제 현장에서 환자가 체감할 수 있는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 실효성 있는 제도로 안착시키는 것이 관건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회장 김길원, 이하 의기협)는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암연구소 이건희홀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나라: 새 정부 희귀·중증질환 보장 강화의 방향은?’ 심포지엄을 개최했다고 10일 밝혔다.
김길원 의기협 회장(연합뉴스 의학전문기자)은 개회사를 통해 “희귀·중증질환 환자들은 치료 접근성의 한계로 인해 신속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겪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제도 개선 요구도 이어져 왔다”며 “정부의 약가 제도 개선 방안이 발표된 만큼, 현장에서 체감되는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1부에서는 김길원 회장이 좌장을 맡아 언론, 환자, 정부의 시각에서 희귀·중증질환 보장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새로운 약가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발표를 진행했다.
첫 번째 발제에 나선 박성민 의기협 대외협력·섭외이사(동아일보 기자)는 ‘언론이 바라본 희귀·중증질환 보장의 현주소와 약가 제도 개선 과제’를 주제로 국내 환자들이 겪는 낮은 치료 접근성과 약가 평가 체계의 구조적 한계를 짚었다.
박성민 이사는 “신약 허가 이후 급여 등재까지 한국은 평균 18개월이 소요되는 반면, 프랑스는 15개월, 일본은 3개월 수준으로, 한국은 해외 대비 신약 출시가 늦고 급여 등재율도 낮은 편”이라며, “신약이 나왔다 하더라도 쓰기까지 오래 걸리거나 경제적 부담이 높아 치료를 망설이는 것이 희귀질환 환자들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박 이사는 낮은 신약 접근성의 원인으로 해외 대비 보수적인 비용 효과성 평가 기준과 혁신 가치의 제한적 반영을 지목하고, “이번 약가 제도 개선 방안은 희귀·중증질환 환자의 신속한 치료를 목표로 마련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다만 실제 현장에서 환자가 체감하는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실효성을 확보한 제도로 안착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치료 현실, 환자가 마주한 시간의 벽’ 주제의 발표에서는 희귀질환 환자들이 직접 발표에 나서 본인과 주위 환우들이 겪고 있는 진단 지연과 치료 접근의 어려움을 생생한 목소리로 공유했다.
김현주 한국저인산효소증 환우회 대표는 “뼈와 치아, 근육, 전신 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성 희귀질환으로 인해 일상을 통증과 골절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며 “승인된 치료제가 있지만 진단의 어려움, 비용의 장벽, 보험의 부재 등 현실적 이유로 많은 환자들이 치료제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는 “환자들이 병과 싸우기 전에 의료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현실”이라며 X선상 골 증상 진단과 만 19세 미만 치료 시작을 요구하는 급여 조건들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을 촉구했다.
정미경 한국폰히펠린다우증후군(VHL) 환우회 총무는 다양한 장기에 악성 및 양성 종양을 유발하는 유전성 증후군 질환의 특성을 소개했다. 치료제를 접한 환자들은 극적으로 개선되는 효과를 보지만,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많은 환자들이 치료제를 복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현실을 설명했다.
정 총무는 “환자들은 반복적인 수술을 받으며 장기와 신체를 절단하고 후유증을 겪고 있다”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복할 권리,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를 호소했다.
마지막 발제는 지난달 말 ‘약가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한 보건복지부를 대표해 김연숙 보험약제과장이 ‘희귀·중증질환 보장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 방향’을 주제로 이번 약가 제도 개선 방안의 핵심 내용을 설명했다. 김연숙 과장은 “희귀질환 환자의 치료 접근성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과제”라며 “환자단체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희귀·중증질환 치료제 등재 기간을 100일 이내까지 단축하는 안을 구체화해 나갈 예정이며 ‘점증적 비용 효과비(ICER)’의 임계값을 질병 위중도와 치료 성과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함으로써 등재가 지연되지 않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약가 유연 계약제 확대를 통해 등재를 앞당기는 것 외에도 사후 관리를 포함한 전반적인 약가 체계를 혁신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견인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진 2부 종합 토론에선 박성민 이사, 김연숙 과장, 정진향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사무총장, 조상희 화순전남대병원 임상시험센터장, 서혜선 경희대 약학과·규제과학과 교수, 박정렬 머니투데이 기자 등이 참여해 ‘포기 없는 치료’를 위한 우선 실행 과제를 주제로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패널들은 제도 개선 방향의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환자들이 체감하는 치료 접근성 향상을 위해 구체적인 실행력과 지속적인 소통이 필수적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김연숙 과장은 “기존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을 평가 분석해 보완점을 도출하고 희귀질환 치료제에 대해서는 임상적 유용성 중심으로 기존 약가 평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100일 신속등재가 가능하도록 환자단체,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유관기관, 전문가들과 협의하며 구체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ICER 임계값 상향 역시 재정 부담, 약제 혁신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기준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진향 사무총장은 “이번 약가 제도 개선 방안은 희귀·난치질환 환자들에게 보다 신속하고 공정한 치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복지부의 현명한 결단”이라며 “환자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어렵게 마련된 이번 개선 방안이 추진 과정에서 일각의 이견에 흔들리지 않고 환자 중심이라는 본래의 가치가 끝까지 지켜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서혜선 교수는 “희귀·중증질환 치료제는 경제성 평가 방식을 적용하더라도 평가 속도를 높이고 근거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선 사용 후 사후 평가하는 방식으로 접근성을 끌어올려야 한다”며 “ICER 임계값 역시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와 함께 “희귀·중증질환 보장성 강화를 위해 기존 경증 질환에 투입되던 건강보험 재정을 전환하는 데 대해서는 국민적 이해와 공감대를 더욱 넓혀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상희 센터장은 “종양내과 의사로서 환자가 홀로 막대한 치료비를 부담해야 하는 비급여 치료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큰 부담이며, 급여 기준과 허가 사항에 따른 치료 차수 제한으로 인해 글로벌 가이드라인에 부합하는 처방을 내리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급여 확대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논의될 수밖에 없는 보험 재원의 효율적 사용과 급여 적용의 우선 순위를 결정함에 있어 의료 전문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박정렬 기자는 “이번 약가 제도 개선 방안을 두고 업계 내에서도 약가 인하를 바라보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지만, 이분법적인 해석보다는 신약 개발부터 접근성 제고까지 아우르는 전반적인 신약 생태계 관점에서 제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언론의 입장에서 앞으로 신속등재 제도가 어떻게 구체화되고 ICER 임계값이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고 덧붙였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