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이 태어난 뒤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씻기다 발가락 사이에 점 하나를 발견하고, 마치 초능력을 입고 나온 것처럼 좋아하며 감쪽같이 숨어 있는 건 재벌점이라고 내게 자랑삼아 일러 주었다. 신생아 때부터 들어오던 재벌점은 아이의 귓전에 이미 익숙해서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에는 발가락 사이의 점 하나가 무척 귀한 것인 양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양말을 꼭꼭 챙겨 신으려고 했다.
아이를 씻어 줄 때마다 발가락 사이에 재벌점이 있으니 이건 귀한 점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 왔기 때문인지, 재벌점 얘기만 나오면 아이는 싱글벙글 얼굴이 환해지곤 했다.
그때도 아직 유년인데, 어느 날 함께 살던 착순이 아줌마가 아이 목욕을 시키면서 발가락을 만지며 씻기려는데 아이가 기겁하고 소리 지르며 아줌마를 밀어냈다고 했다. 발을 붙잡으며 만지지 말라고, 재벌점 떨어지면 큰일 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줌마는 배꼽을 잡고 웃다가 아이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염치가 없었다고 했다. 훗날 재벌 될 거니 두고 보라는 말에 오히려 아이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내게 전해 주었다. 할머니는 은행 통장도 도장도 필요 없는 거금을 손자 가슴에 깊이 담아 주었다.
발가락 사이 점 하나로 막내아들이 장래 재벌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말이다. 재벌 인증이 발가락 사이에 숨겨져 있으니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동심의 마음밭에 야무지게 새겨진 꿈을 그 어느 누구도 앗아 갈 수가 없다. 해리포터 저자나 할 수 있는 만화 같은 얘기를 은근히 믿어 보고 싶은 것은 불로소득을 바라는 불량한 마음에서 시동이 걸린 것은 결코 아니다.
청렴결백한 삶의 본보기인 내 어머니의 말은 늘 덕담이었다. 사리에 맞지 않는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을 가진 어머니가 농담으로 한 얘기가 아니었기에, 솔직히 속물근성이 용량을 훨씬 넘어서더라도 그냥 믿고 싶었다. 다른 할머니들의 마음도 동일할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어불성설의 말은 손자를 두고 한 말이겠지. 계산하고 따져서 주고받는 것은 이미 사랑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리라.
요즘 세상은 부자지간, 모자지간 모두가 저울질하는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한탄한다. 자식들에게서 쥐꼬리만큼 받은 용돈이라도 손자의 장래를 염려하여 군것질을 억제하며 한 푼 두 푼 모아 손자에게 사랑의 징표를 남기고픈 마음이란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의 시조가 아닌가 싶다. 자식을 사랑해도 줄 것이 없는 야속한 가난 속에서 품에 안은 사랑스러운 손자에게 예언 같은 덕담을 남긴 어머니, 통 큰 선물 통째로 안겨 준 지혜로운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다.
<황매실>
-김국애
새벽이슬 젖은 풀밭
황매실이 부르는 소리
어렴풋이 바람 속에서 뚝뚝
매실 떨어지는 소리
새들도 깨어나기 전인데
그제도 오늘 새벽에도
매실나무 아래 서니
수백 송이 복수초 피어난 듯
촉촉한 풀밭에 영롱한 매실
황금매실
뭉개고 흔들어 후려치는 바람도
황매실의 시조를 알았을까
어둔 새벽 환하게 비추는
황금알 한가득 담아 드니
알알이 향기 출렁이네
얼음 맺힌 가지 마디
매화 꽃망울 터져
뚝뚝 떨구던 눈물
혹한의 매서운 얼음산 넘어
축복 나무 황금열매
황홀한 꽃말은 고결한 마음
온 집안 향기 가득하네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