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40명, 더는 잃을 수 없다”… 시민문화행동 ‘명대로 삽시다’ 출범

입력 2025-12-05 09:15 수정 2025-12-05 09:15

국내 자살 사망자가 2024년 한 해 1만4872명, 하루 평균 40.7명에 이르며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자살예방 문화운동 ‘명대로 삽시다’가 4일 공식 출범했다. 캠페인은 한국이 OECD 국가 중 22년째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특히 10대부터 40대에서 자살이 사망 원인 1위인 현실을 지적하며 시민 주도적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발기인 20여명은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열린 발대식에서 “더 이상 정부 대책만 기다릴 수 없다”며 정부와 사회의 실효성 있는 대책을 요구했다.

행사는 오전 9시 30분 국회 앞에서 시작된 1인 릴레이 피켓팅으로 문을 열었다. 한국자살유족협회 강명수 회장을 시작으로 고 임세원 교수의 아들 임정섭씨, 김혜민 PD, 가수 미미시스터즈, 서지현 전 검사, 김지수 작가 등이 차례로 피켓을 들었다. 이들은 ‘하루 평균 40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나라’ ‘국민이 명대로 살 수 있는 희망을 보장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국회 앞을 지켰다.

임정섭씨는 “슬픔을 겪고 있는 당사자와 유가족을 위로하고 떠받쳐주는 정책과 시민의 손길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살예방 메시지를 담은 곡 ‘우리 자연사하자’로 알려진 미미시스터즈는 “예전엔 자살예방을 전문가 영역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서로가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옆 사람부터 살리는 마음으로, 자연사할 때까지 같이 버텨보자”고 했다.

“정부 대책만 기다릴 수 없다”

국회의원회관에서 이어진 발대식에는 발기인 45명 중 청년, 자살유족, 정신건강 전문가, 예술인, 언론인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발기인단 45명은 하루 평균 40명 넘게 자살로 숨진다는 현실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신영철 전 대통령 직속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장은 축사에서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어쩌면 ‘어리석을 정도로 어려운 길’을 택한 분들”이라며 “그러나 이런 어리석음 덕분에 사회는 성장한다. 자살예방은 한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오늘이 시민문화행동의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명수 한국자살유족협회 회장은 “유족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유족들이 직접 정책을 말하고 참여하는 장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밝혔다. 조동연 한국자살유족협회 이사도 “유족은 일반인보다 자살률과 우울 위험이 높다”며 “유족을 돌보는 체계가 자살예방의 중요한 축”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책임”

정신질환자들과 가족을 위한 유튜브 ‘조우네 마음약국’을 운영하는 고하영씨는 “통계는 매년 경고음을 내지만 너무 오래 울리다 보니 익숙해져 버렸다”며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 정신건강 캠페인 단체 ‘마인드SOS’를 이끄는 류혜원 대표는 “미국에서 자살률·출산율 연구를 하며 한국의 심각성을 실감했다”며 “어린 시절 자살시도 경험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데이터를 보는 전문가로서 이 문제에 끝까지 책임을 갖겠다”고 밝혔다.

보육원 출신으로 자립준비청년들을 돕는 브라더스키퍼 창립자 김성민 씨는 “5년 전만 해도 일주일에 한두 명씩 청년들의 장례식장을 다녔다”며 “애도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형제가 형제를 지키듯 서로의 생명을 붙드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자살은 국가적 재난… 시민이 감시자 돼야”

1인 피켓팅 아이디어를 낸 서지현 전 검사는 “미투 사건을 통해 ‘조직’이 한 개인을 벼랑 끝까지 몰 수 있음을 봤다”며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 국가가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자살은 국가적 재난”이라며 “이제는 침묵이 아니라 시민의 감시와 행동이 필요하다. 명대로 좀 삽시다”라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김현수 성장학교 별 교장은 “2011년 자살예방법 제정 이후 전문가들이 충분히 역할을 못 한 건 아닌가 죄송한 마음이 든다”며 “저 역시 자살유족으로서 시민들과 함께 이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고 정부의 책임 있는 정책을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김지수 작가는 윤동주의 시 ‘팔복’을 인용하며 “슬픔에 고립되면 죽음의 지점까지 갈 수 있지만, 서로의 슬픔이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버틸 수 있다”며 “연결성과 책임이 자살률을 낮출 열쇠”라고 말했다.

언론인 대표로 참석한 지형철 KBS 기자는 “지인이 최근 극단적 죽음을 맞았다”며 “언론은 문장 하나에도 생명이 달려 있다는 마음으로 쓰겠다”고 했고, MBN 이혁준 기자는 “언론에선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며 “자살은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이라고 밝혔다.

“14,872명 이름으로 행동한다”

캠페인의 첫 활동은 지난해 자살 사망자 수와 같은 숫자를 목표로 한 ‘1만4872명 서명운동’으로, 내년까지 목표 수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어 10분간 피켓을 들고 인증하는 1인 피켓팅을 온오프라인에서 확대할 예정이다. 실내에서도 참여할 수 있어 시민 누구나 동참할 수 있다.

캠페인측은 피켓이 하나씩 사라지는 이미지 영상을 공개하며 “하루 평균 40명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현실을 멈추기 위한 시민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들이 주도해 출범한 이번 자살예방 문화운동은 정부에 ▲자살예산 확대 ▲독립 전담기구 설치 ▲유족·당사자 중심 정책 추진 등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