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생사도 확인할 길이 없는데, 이재명 대통령이 ‘처음 듣는다’는 표현을 쓰시니 절망감과 무력감이 들었어요.” 북한에 억류된 최춘길 선교사의 아들 최진영(35)씨는 4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이같이 토로했다.
이 대통령은 전날 외신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억류된 우리 국민 석방 문제를 묻는 기자 질문에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라 정보가 부족하다. 상황을 좀 더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북한에 억류된 김정욱(13년 10월부터 억류), 김국기(14년 10월부터 억류), 최춘길(14년 12월부터 억류) 선교사 가족은 정부 출범 반년이 지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억류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 허탈함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최씨는 지난 11년 동안 억류 사실을 알리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지난해에는 윤석열정부 주선으로 엘리자베스 살몬 당시 UN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줄리 터너 당시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등을 만나 사건을 공론화시키기도 했다. 최씨는 “아버지 구출을 위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정부인데, 대통령이 아예 모른다니 이제까지 노력과 희망이 허공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최씨는 아직까지 아버지가 어떤 연유로 납북됐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최씨는 “오토 웜비어의 이름은 국적이 미국이라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아버지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아버지 이름이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65)씨는 9월 24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김씨는 “정 장관에게 동생 생사라도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대통령이 모르고 계신다니 기대가 무너진 느낌이고,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당시 남북 관계 경색을 이유로 “급하게 할 수는 없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씨는 “국가 간 관계가 막혀도 시민단체, 종교계를 통해 우회적인 노력을 할 수 있게 지원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석열정부에서 2023년 신설한 통일부 장관 직속 ‘납북자대책팀’은 지난달 4일 통일부 조직 개편으로 사라졌다. 통일부는 사회협력국 산하 이산가족납북과에서 관련 업무를 이어받는다는 입장이지만, 성격이 다른 이산가족 업무와 합쳐져 중요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씨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이 있을 테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조직개편 이후 담당자들을 만나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겨울이라 북쪽은 더 춥고 힘들 텐데, 동생 생사라도 알고 싶다”고 토로했다.
김국기 선교사의 아내 김희순(71)씨는 “정부마다 기대를 품고 무작정 기다렸지만, 확인이 어렵다는 말만 돌아왔다. 사실 체념 상태”라고 말했다. 남편을 떠나보낸 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아 생활한다는 김씨는 신장 질환이 악화돼 투병 중이다. 김씨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자꾸만 남편 생각이 났고, 스트레스가 쌓여 몸 상태가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이 알게 됐으니, 하나님이 그분을 일하게 해 남편의 생사라도 알려주시지 않겠느냐. 기도할 뿐”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공지를 통해 “현재 우리 국민 6명(탈북민 3명 포함)이 2013년부터 2016년에 걸쳐 간첩죄 등의 혐의로 억류돼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국민일보 취재에 따르면 억류자 다수는 북·중 접경지역에서 복음 활동을 펼치던 중 북한 당국에 체포됐다. 대부분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북한에 들어갔다가 간첩, 국가 전복 음모 등의 혐의로 ‘무기노동교화형’ 등 중형에 처해졌다. 북한 당국은 북·중 접경지역에서 이들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유인 계략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졌다(국민일보 2024년 9월 23일자 1면 기사 참조).
북한이 그간 억류된 타국민을 풀어준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2017년에는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 2018년에는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 김상덕, 김학송씨가 풀려났다. 최근에도 북한 감옥에서 12년간 복역한 중국 국적의 동포 장만석 집사가 송환됐다. 대통령실은 “남북간 대화·교류가 장기간 중단된 상황에서 분단으로 인한 국민 고통은 지속되고 있고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상황”이라며 “이 문제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조속한 남북대화 재개 노력을 통해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동환 박준상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