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도사 ‘베릴’ 조건희 ②

입력 2025-12-03 20:03 수정 2025-12-04 00:50

2일 강원도 원주의 한 카페에서 ‘베릴’ 조건희를 만났다. 조건희는 지난달 18일 디플러스 기아와 계약이 종료된 뒤 자유계약(FA) 신분으로 전환됐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를 만나서 최근 이적시장 동안 어떤 고민을 했으며, 심사숙고 끝에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들어봤다.

아울러 2017년부터 걸어온 그의 프로게이머 커리어를 다시 돌아봤다. 이번 ②편에서는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담원 기아부터 DRX를 거쳐 KT 롤스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지난 ①편에서는 그가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시점부터 처음 LoL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한 2020년까지의 얘기를 다뤘다.

-월즈 디펜딩 챔피언으로 시작했던 2021시즌은 어땠습니까.
“2020년에 배워뒀던 걸 토대로 자연스럽게 2021년 스프링 시즌까지 풀어나갔어요. 그런데 MSI부터 메타 변화가 생겼고 그때부터 좀 힘들어지기 시작했죠. MSI 땐 제 개인 폼도 안 좋았고 바텀 티어 정리가 잘 안 됐어요. 그때 바루스 티어가 정말 높았거든요. 바루스 상대로 라인전을 버틸 수 있는 픽이 있는가를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카이사·자야·트리스타나 3개를 돌려 쓰는 구도가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RNG가 마지막 세트에서 바루스를 풀더라고요. 바루스를 풀어주는 대신 바루스가 딜을 할 수 없는 구도와 조합을 만들더라고요. 우리가 라인전을 너무 의식해서 바루스에만 시선이 쏠렸던 게 치명적이었던 거죠.”

-결승 5세트에서 탐 켄치로 W 스킬(집어삼키기)을 안 배웠다가 빠른 갱킹을 당했죠.
“맞아요. 그때 라인전을 세게 하려고 3레벨에 W가 아니라 Q 스킬을 2개 찍었어요. 라인전 상성이 좋았으니까, 심지어 원딜과 서포터 둘 다 좋았으니까 그 유리함을 토대로 벌어들이는 이득을 극대화하려고 라인전에 도움이 되는 Q 스킬을 한 개 더 찍었어요.”
LCK 제공

-RNG 바텀이 바로 눈치채고 갱을 불렀던 걸까요. 아니면 도박수가 맞아떨어졌던 걸까요.
“아마 상대도 탐 켄치의 스킬을 한 번 맞아보고 바로 눈치챘을 거예요. 저도 3레벨에 상대 스킬을 맞았을 때 대미지를 보고 상대가 특정 스킬을 2개 찍었다는 걸 알아채거든요. 프로게이머라면 당연히 체크할 수 있을 거예요.”

-LCK 서머 시즌은 힘들게 치렀습니다. ‘고스트’ 장용준이 잠깐 휴식을 취하기도 했죠.
“서머 시즌에 발걸음 분쇄기가 정말 큰 버프를 받았어요. 그래서 탑 녹턴, 미드 세트가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담원은 그걸 빠르게 캐치하지 못해서 애를 먹었죠. 저와 용준이는 MSI 후유증 때문인지 한동안 기량이 회복되지 않았고요.
용준이가 휴식을 취하면서 ‘캐니언’ (김)건부가 미드라이너로 가고 ‘쇼메이커’ 허수가 원딜로 들어갔어요. 둘이 바텀 듀오를 간 것도 재밌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런 상황에서 3승1패를 하는 게. 허수가 정말 자신감에 차 있었어요. 그래서 원딜로도 잘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우승을 하긴 했습니다.
“저는 결승에 젠지가 올라오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T1이 젠지를 3대 1로 잡고 올라오더라고요. 서머 시즌 결승이 스프링 시즌보다 힘들었어요. 1·2세트는 준비를 잘한 덕분에 이겼고 3세트는 오만한 밴픽을 했다가 졌죠. 그래도 곧바로 밴픽 수정을 잘해서 다음 4세트에서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어요.”

-MSI에 이어 월즈도 2위로 마무리했습니다.
“2021 월즈는 스크림 성적이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결승 상대였던 EDG도 스크림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걸로 알아요. 아마 EDG는 준결승전에서 반대편 브래킷의 T1과 스크림을 많이 했을 거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티어 정리를 잘한 거 같아요.
결승전 1세트에서 질리언 밴을 할지 말지를 많이 고민하다가 결국 풀었어요. 그때 밴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2·3세트는 담원이 티어 정리를 더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4세트 때 도박을 걸었다가 졌죠. 루나미가 1티어인 메타에서 루시안을 상대에게 풀어주고 나미를 뺏어오는 전략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안 통했어요. 미드 오리아나 대 조이 구도에서도 조이가 대치 구도에선 더 강점이 있다 보니까 압박감이 심했어요.
사실 2021시즌은 결과만 놓고 보면 나쁜 시즌은 아니었어요. ‘우준우준(우승·준우승·우승·준우승)’이니까 골든 로드에 가까웠던 시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막상 시즌을 치렀던 선수들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컸죠.”
LCK 제공

-2021시즌이 끝나고 담원을 떠나 DRX로 이적했습니다.
“월즈가 끝나고 곧 담원과 계약 기간이 종료됐어요. 그땐 코로나19 때문에 FA 전환 이후에도 자가 격리 기간이어서 밖에 나가질 못했어요. 그러다가 김정수 감독님과 DRX에서 한번 도전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DRX의 멤버가 나쁘지 않더라고요. ‘킹겐’ 황성훈, ‘표식’ 홍창현도 그렇고 ‘제카’ 김건우는 LCK에서 활동한 적 없었지만 솔랭에서 워낙 잘했고요. 남은 건 원딜 자리였어요. 그때 ‘데프트’ (김)혁규 형이 생각났어요. 혁규 형이랑 같이 해보고 싶어서 ’혁규 형이 가면 나도 간다’고 했죠.”

-월즈에서 역대 최고의 ‘업셋 우승’을 이뤄냈습니다. 조금이라도 예상했습니까.
“시즌 시작 전에는 ‘그래도 4시드는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규 시즌 막판 최하위였던 한화생명에 1만 골드 이상 차이로 패배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화생명과의 경기는 정규 시즌 순위와 관계 없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앞으로 이어질 플레이오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플레이오프에서도 샌드박스에 1대 3으로 져서 조기 탈락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선발전도 준비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도 끝까지 파이팅 하자’는 분위기로 치렀는데 KT전이나 샌드박스전이나 결과가 좋더라고요.”

-결국 시즌 초 예상처럼 4시드로 월즈에 나가긴 했습니다.
“4시드니까 월즈를 멕시코 플레이-인부터 시작했잖아요. 첫 경기가 하필 RNG전이었어요. 그 경기를 잡아야 편하게 갈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당시에 마오카이 정글이 OP냐, 아니냐를 놓고 팀내에서 여러 의견이 오갔어요. ‘초반에 너무 약하다’ ‘그래도 후반 가면 좋다’ 이런 얘기를 많이 나눴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창현이가 마오카이로 잘해줬죠.”

-하이머딩거 서폿으로 메타 변화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2022 월즈는 케이틀린, 루나미, 시비르·유미가 메타 픽이었어요. 그중에서 케이틀린은 카르마나 럭스가 짝꿍이잖아요. 그 두 챔피언이 빠졌을 때 쓸 만한 파트너를 고민하다가 찾은 게 하이머딩거였어요. 플레이-인에선 팀들이 유미보다 탱커 서포터를 선호했어요. 하이머딩거가 탱커 상대로 좋을 거 같아서 스크림에서 실험해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더라고요.
하이머딩거를 필승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룹 스테이지 TES전에서 밴이 나오더군요. 그땐 정말 당황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하이머딩거의 파트너를 찾았죠. 애쉬도 써보고, 바루스도 써보고, 이즈리얼도 써보고.”
라이엇 게임즈 제공

-준결승전에서 젠지를 꺾은 것부터 DRX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건 제 추측인데 그 당시 젠지가 T1과 스크림을 많이 했을 거 같아요. 원래 카르마류의 챔피언을 선호하는 팀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카르마도 고르고 바텀 주도권을 중요시하던 게 인상 깊었어요. 1세트를 지고 나서 ‘LCK 때처럼 도저히 못 이길 정도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팀원들 전부 그랬을 거예요. 우리가 해야 할 것만 하면 이길 수 있겠다 싶었죠.”

-1세트는 젠지의 완승이었는데 의외입니다.
“젠지가 완승하긴 했는데 그들이 압도적으로 잘해서 이긴 게 아니라 DRX가 못해서 이긴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혁규 형이 그랬을 거예요. ‘우리가 조금만 더 잘하면 되겠다’고.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건 T1과의 결승전도 비슷했어요. T1이 1세트를 쉽게 이기고, 2세트를 DRX가 어렵게 이겼는데도 ‘우리만 잘하면 오늘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승전 5세트에서 바드를 뽑은 건 신의 한 수가 됐습니다.
“5세트는 정말 후회 없이 해보자는 즐거운 분위기였어요. 밴픽 당시에는 소라카나 노틸러스도 후보군에 있었는데 바드가 빅토르·바루스, 두 뚜벅이 상대로 좋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바드를 골랐어요. 아마 그때 노틸러스나 소라카를 골랐다면 결국 졌을 거 같아요.”

-월즈 2회 우승 후 스스로 LoL의 지식에 통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아니요. 저는 그때까지도 다른 사람한테 라인전 구도에 대한 디테일한 지식을 배운 적이 없었어요. 지금이 그때보다 나아진 거예요. 그때는 그런 디테일이 전혀 없었어요. 결승 상대였던 ‘케리아’ (류)민석이가 그런 건 더 잘했죠. 민석이와 2020년에 처음 붙었는데 그 이후로 해가 다르게 실력이 발전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메타를 관통하는, 숨어있는 챔피언을 찾고 그걸로 이득 보는 플레이를 잘했어요. 2020년 판테온, 2022년 하이머딩거처럼요. 그리고 제게는 무의식으로부터 이어지는 결단력이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내가 이 플레이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그걸 실행으로 옮겼을 때 결과가 좋았어요. 그래서 우승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라이엇 게임즈 제공

-예상 밖입니다. ‘롤도사’로 불리기도 했던 조 선수라 운영법을 잘 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LoL에서 운영은 5명이 다 같이 하는 거예요. 모든 선수가 각자 라인의 상황을 공유하면서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는 게 LoL 운영의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시대에는 누구 한 명이 혼자서 방향을 결정할 수 없어요. 그리고 게임 흐름을 읽지 못하는 선수에게 오더를 내리더라도 그 선수가 오더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요.
5명이 모두 ‘지금은 내가 사이드를 가야 한다’ ‘지금은 내가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운영이 완성돼요. 그런데 요즘 상위권 팀들의 게임을 보면 선수들이 전부 그런 수준에 올라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더 어려워요.”

-별명이 ‘롤도사’지만 지식보다 감각에 의존하는 선수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당연히 저도 데이터를 토대로 플레이해요.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데이터보다 감각에 의존한 플레이를 한다고 스스로도 느껴요. ‘지금 들어가야 한다’ ‘지금 들어가면 안 된다’ 이런 감을 따르는 게 감각파인 거잖아요.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더 힘들어지니까 지금 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요. ‘도란’ 최현준 선수나 ‘페이커’ 이상혁 선수 게임을 보면 ‘이걸 이 타이밍에 들어가네’ 하는 상황이 많이 나오는데 저도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해요.”

-2023시즌, 선수단은 와해됐지만 조 선수는 팀에 남았습니다. 부진했죠.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저는 라인전 디테일에 대해 다른 선수와 얘기해본 적도 없고, 그걸 저한테 알려준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2023시즌에 ‘덕담’ (서)대길이와 라인전 디테일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눠봤다면 또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컸던 시즌이에요. 그 아쉬움이 남아서 2024시즌에 혁규 형과 다시 만났을 땐 라인전 디테일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칼날비 메타였죠. 유난히 바텀 라인전 구도가 예민한 시즌이었습니다.
“2022 월즈에서 하이머딩거를 서포터로 썼잖아요. 하이머딩거의 포탑은 마법저항력보다 방어력이 높아요. 그래서 상대 서포터가 하이머딩거 포탑을 조금이라도 쉽게 부수려면 AD 챔피언을 해야 했어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즈리얼 서포터를 고민했는데 거기서부터 시작이었어요. 그게 2023시즌에는 완전히 메타가 됐죠. 이즈리얼 서포터는 자주 안 나왔지만 칼날비 원딜 서포터가 많이 나왔어요. 거기에 서포터 전용 아이템의 맹점도 있었고요.”
LCK 제공

-2024시즌엔 KT로 갔습니다. 김혁규와 재회했습니다.
“시즌 시작 전에는 ‘2023시즌의 아쉬움을 없애기 위해 혁규 형과 라인전 얘기를 많이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시즌 시작 후에는 라인전에서 생각보다 많이 삐그덕거렸어요. 그리고 2024시즌도 올해처럼 한 끗 차이로 다 져서 아쉬웠어요.”

-최근 김혁규가 ‘퍼펙트’ 이승민의 월즈 활약상을 두고서 ‘잘한다 했잖아’라고 했다던데요.
“2024시즌에 승민이를 처음 보신 팬분들은 실망하셨을 수도 있지만 승민이가 스크림에서 정말 잘했어요. 신인이니까 당연히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죠. 사실 팀원들은 승민이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게 우선 라인전을 준수하게 잘해줬거든요. 그런데 승민이는 목소리가 좀 작았어요. 팀원들도 승민이 콜이 잘 안 들리니까, 부진에 그 영향이 있었던 거 같긴 해요.”

-인터뷰는 이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끝으로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2016년 겨울부터 프로게임팀에 들어가 합숙 생활을 쭉 했어요. 사실상 저의 20대 전부를 프로게이머에 투자한 셈이네요. 가끔 ‘난 프로게이머가 안 됐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저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걸 좋아하던 저였는데 프로게이머가 돼서 그 게임을 더 재밌게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2026시즌의 제 거취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선수 생활이 이대로 끝날 수도 있겠죠. 그래도 프로게이머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9년 동안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재밌는 일이 더 많았어요.
고마웠던 사람들도 많아요. 저를 처음 담원에 불러주신 김목경 감독님, SKT T1 시절부터 저를 데려오고 싶다고 말씀해주셨던, 2022시즌에 같이 월즈 우승을 이뤄냈던 DRX 최병훈 단장님, 제게 LoL을 가장 많이 알려주신 양대인 감독님. 당장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외에도 감사한 분들이 많아요.”

원주=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