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글로벌 스테이지 할리우드 영화제가 주목한 건 자극적인 스릴러나 화려한 액션이 아니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이 영화제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 3관왕에 오른 영화 ‘피렌체’는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중년 남성의 여정을 그렸다.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창열 감독은 “모든 제작 과정이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하나님 보고 계시죠. 좀 도와주세요.”
이 감독은 촬영 중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잠시 멈춰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영화 촬영 현장은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변수와 제약의 연속”이라며 “어려운 장면이나 돌발 상황 앞에서 5분 정도 쉬어가며 일상적 기도로 하나님을 붙잡는다”고 말했다.
그의 기도는 현장에서 구체적인 응답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국민 배우’ 세라 일마즈를 섭외할 때였다. 이 감독이 특별출연을 요청했을 때, 세라 일마즈는 “내가 왜 이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 달라”며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이 감독은 “자칫 섭외가 무산될 수도 있는 긴박한 순간 마음속으로 짧게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다”고 말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던 것 같아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의 비유, 영화 속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떻게 그렇게 막힘없이 이야기했는지 기억 안 날 정도였죠.” 진심은 통했고 세라 일마즈는 흔쾌히 합류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두오모 성당 촬영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상업 영화에 두오모 내부 촬영이 허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라 일마즈는 당시 심장 수술을 받은 지 불과 2주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직접 성당 관리인을 찾아가 설득했다.
날씨마저 기도 응답 같았다. 이 감독은 “피렌체에 머무는 대부분의 날에 비가 내렸고 중요한 야외 촬영을 앞두고도 폭우가 쏟아졌다”고 했다. 촬영을 포기하고 철수하려는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이 감독은 “까짓거 뭐, 하나님이 해주시겠지”라고 외치며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촬영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비가 뚝 그쳤습니다. 허가받은 2시간 동안 두오모 성당 촬영을 무사히 마쳤고 종료 시간을 15분 남기고 촬영을 끝내자마자 다시 비가 쏟아졌습니다.”
영화는 치열하게 살아온 중년 남성 석인(김민종)이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30년 전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나는 내용을 담았다.
이 감독은 “단테가 열망했던 천국의 이상과 구원의 메시지를 쿠폴라 두오모 성당과 같은 공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며 “주인공 석인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이탈리아 청년 엔조는 “신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알아”라는 석인의 냉소적인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침착해, 신이 우릴 부를 거야. 침착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 신의 음성과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주인공 석인은 이 감독의 삶이 투영된 캐릭터이기도 하다.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 대기업에서 12년간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1등 아니면 안 돼”라는 강박 속에 살았다는 그는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영화계에 뛰어든 후에도 성공을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켰다고 했다.
이 감독은 “고등학생 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선데이 크리스천’에 불과했다”며 “성공에 집착하느라 신앙과 가족 등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 90세 아버지가 매일 새벽 3시 30분, 자신을 위해 기도해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영화 일을 하다 보면 신앙이 흔들릴 때도 있고, 매 순간 성령 충만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습니다.”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