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호두까기인형’은 매년 12월 전 세계 공연장을 점령하는 스테디셀러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들이 아이에게 한번은 보여줘야 할 작품이 됐다. 올해도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을 필두로 광주시발레단, 와이즈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김용걸발레단,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부산발레시어터 등이 ‘호두까기인형’을 전국 공연장에서 선보인다.
독일 작가 E.T.A 호프만의 ‘호두까기와 쥐의 왕’을 원작으로 한 ‘호두까기인형’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호두까기 인형을 받은 소녀 클라라(혹은 마리)가 꿈속에서 멋진 왕자로 변신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과자왕국을 여행한다는 줄거리다. 18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지금의 마린스키극장)에서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가지고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했다.
그런데, 발레 ‘호두까기인형’의 초연은 지금과 같은 인기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실패로 끝났다. 당시 비평가들은 “무용수들은 엉망이고 예술적으로 전혀 기대할 것이 없는 작품”이라며 “발레라는 장르를 한 단계 후퇴시켰다”고까지 말했을 정도다. 1막에 마임이 지나치게 많고 2막에서 발레리나의 춤이 어색하다는 등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됐다. 클라라와 프리츠 남매 그리고 파티에 온 친구들은 물론이고 장난감 병정과 쥐, 눈송이 등 여러 역할을 아이들이 맡았기 때문이다. 앞서 발레 공연에 아이들이 잠깐 나오는 경우는 있지만, 주인공을 비롯해 다양한 역할까지 맡은 경우는 ‘호두까기인형’이 처음이었다. 황실발레학교 학생들이 대거 출연했는데, 남아있는 사진을 봤을 때 수십 명 수준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비평가들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통에 어른들의 춤까지 방해하는 등 무대가 너무 어수선해서 참을 수 없었다”는 리뷰를 남기기도 했다.
‘호두까기인형’은 1892년 초연 실패 이후 몇 번 공연되지 못한 채 황실극장 레퍼토리에서 빠졌다.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은 1919년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에서 알렉산드르 고르스키가 재안무에 나서면서다. 고르스키는 초연 당시 지적됐던 문제점 중 하나인 아이들 출연과 관련해 성인 무용수들로 대거 교체했다. 그리고 1934년 레닌그라드 키로프 발레단(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바실리 바이노넨이 고르스키 버전을 바탕으로 클라라가 꿈에서 깨어나는 설정을 더하는 등 재안무하면서 본격적인 부활이 이뤄졌다.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받은 바이노넨 버전은 이후 수많은 ‘호두까기인형’ 재안무에 영향을 끼쳤다.
다만 ‘호두까기인형’의 세계적인 유행은 1954년 조지 발란신이 이끄는 미국의 뉴욕시티발레단 공연이 계기가 됐다. 러시아에선 아이들의 출연이 실패의 주요 원인 으로 꼽혔지만, 뉴욕시티발레단에서는 그 반대였다. 프티파 버전을 토대로 재안무한 발란신은 아메리칸 발레학교의 학생 125명을 더블캐스트로 무대에 세웠고, 학생들은 러시아 초연에서처럼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가족을 중시하는 미국 중산층의 가치관과 어울리는 뉴욕시티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은 큰 인기를 끌며 연례 전통이 됐다. 그리고 미국 대형 방송사 CBS가 1958년 크리스마스에 공연 실황을 방영한 것은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기폭제가 됐다. 덧붙여 미국의 많은 발레단은 뉴욕시티발레단을 벤치마킹해 ‘호두까기인형’에 아이들을 많이 출연시키고 있다. 대형 발레단에선 100명이 넘기도 한다. ‘호두까기인형’이 발레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첫 무대 경험을 쌓고 공동체 의식을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들 출연과 관련해선 ‘빅3’인 국립발레단, 유니버설 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의 공연에 각각 15명, 40명, 22명이 나온다. 다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 발레단은 지역 투어에선 키가 작은 단원 15명 정도가 아이들 역할을 대신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