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은 철학…기술보다 사람, 속도보다 순리”…세미산업 30년의 힘

입력 2025-12-02 14:09
임경호 세미산업 대표가 경기도 화성의 본사 회의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포장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소신으로 지난 30년간 세미산업을 국내 포장재 전문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포장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입니다. 포장은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 신뢰의 장치입니다.”

지난 30년간 포장재를 연구하며 만들어 팔아온 장인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격언처럼 들렸다. 포장재 전문 기업인 세미산업의 임경호 대표 얘기다.

창립 30주년을 맞은 세미산업의 임 대표를 2일 경기도 화성에 있는 본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세미산업은 임 대표가 포장재의 기본조차 모르던 초창기, 우연히 시작했던 사업인데 어느새 국내 식품·소스·음료 포장재 시장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는 “무대뽀로 시작했다”는 소회를 전하면서도, 수십 년간 쌓아올린 경험과 시행착오, 그리고 ‘순리’를 향한 믿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포장은 단순한 기술이나 생산의 차원 그 이상이다. ‘소비자가 제품을 처음 만나는 순간’을 책임지는 일이자, 보이지 않는 신뢰를 완성하는 일이 곧 포장의 본질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임경호 세미산업 대표가 정부 포상 수상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품질 혁신과 상생경영 공로를 인정받아 중소기업 분야에서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다. 세미산업 제공

그의 포장 철학은 그가 겪었던 한 사건을 통해 더욱 단단해졌다. 2000년대 초, 한 대형 고객사에서 당면 포장 불량률이 30%에 이르러 납품 전체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고객사 회장은 “이러다 우리 회사도 망한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불량률을 개선하기 위해 임 대표는 직원들과 밤을 세워가면 타개책을 논의했다. 기존에 눕혀 쌓던 포장 방식 대신 ‘세워 적재’ 방식을 도입하면서 불량률을 3% 수준으로 낮췄다. 임 대표는 “그때 포장의 본질을 다시 배웠다. 포장은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 신뢰의 장치”라고 되뇌었다.

이같은 포장철학은 그의 경영 철학으로 이어진다. 임 대표는 “‘열심히’보다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직원들에게 A4 용지를 나눠주고 ‘1부터 100까지 더하라’는 과제를 냈다. 대부분은 30이나 50에서 멈췄지만, 한 직원은 단 1분 만에 끝냈다. ‘가우스 공식’을 활용한 결과다.

그는 “열심히 더한 사람이 아니라, 공식을 떠올려 더 잘한 사람이 진짜 능력자”라고 말했다. 생각하고 행동하며 즐길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 기업의 지속 성장을 이끄는 힘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어 “세미산업은 B2B 기업이지만 결국은 B2C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관점 전환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소비자들은 포장 속 제품을 직접 볼 수 없고, 결국 포장 디자인과 품질로 제품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세미산업이 생산하고 있는 주요 포장재 제품들. 세미산업 홈페이지

임 대표는 포장재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대기업 협력업체 네트워크 등을 통해 국내외 다양한 사례를 꾸준히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미산업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만들어오고 있다. 그의 목표는 단순했다. “고객이 먼저 찾는 포장재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세미산업이 바라보는 다음 30년의 핵심은 ESG와 글로벌 시장이다. 특히 2026년부터 유럽 시장에서 강화되는 탄소 저감 기준(PWWR)과 재활용 소재 기준은 포장재 업체에 큰 도전이자 기회다.

임 대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착한 경영이 아니라 현명한 경영 툴”이라며 “지속가능성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세미산업은 현재 유럽에 제조 거점을 둔 주요 고객사들과 협업하면서 재활용 소재 기술을 강화하고,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한 인증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임경호 세미산업 대표(앞)와 임재윤 전무(뒤)가 경기도 화성의 본사 회의실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창립 30주년을 맞은 세미산업은 2세 경영 준비와 함께 조직 혁신 및 글로벌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 그는 향후 30년 이후의 경영을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사람’을 꼽았다.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는 외부 전문가와 함께 4개년 단위의 비전과 전략을 재정비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두 번째 주기를 운영 중이다. “후회를 최소화하는 결정을 하겠습니다. 서로 직언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 되겠습니다.”

지난 30년간 제조업의 최전선에서 버텨온 임 대표가 앞으로의 30년을 내다보며 강조한 건 최첨단 기술이 아니었다. 기술보다는 사람을, 속도보다는 순리를 앞세웠다. 그리고 혼자가 아닌 ‘동행’이었다.

화성=글.사진 이은철 기자 dldms878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