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잠 자던 140년 기록’… AI가 해독 가능성 열어

입력 2025-12-01 12:18 수정 2025-12-01 15:05
1902년 미국 드루신학교 출신 폴 웨이앤드가 존 무어를 조선 선교사로 추천하며 보낸 서신. 필기체와 노후한 잉크 탓에 전문 연구자도 해석에 수 분이 걸리는 자료지만, 소 교수가 구축한 AI 분석 파이프라인을 통과하면 1~2초 만에 해독은 물론 날짜·발신·수신·주제·사건 맥락까지 자동 정리된다. 소 교수 제공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은 학교 병원 설립 과정에서 개항기 조선의 사회상까지 근대사의 핵심을 담은 1차 사료다. 당시 조선 사회 변화를 최초로 기록한 보고서, 개인 서신, 일지, 회계 문서들이 포함된다. 현존하는 자료의 상당수는 한국교회 초기 역사뿐 아니라 근대 조선의 제도·문화 변화를 서양인의 시선으로 남긴 귀중한 기록이다.

국민일보가 1일 단독 입수한 스캔본 중에는 이런 미해독 문서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드루신학교 출신으로 미국 감리교 목사인 폴 웨이앤드가 존 무어를 조선 선교사로 추천하며 보낸 1902년 서신이 있다. 이 편지에서 웨이앤드는 “그는 어떠한 임무가 맡겨져도 충성을 다할 것이며 결코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실제로 무어 선교사는 조선에 파송된 뒤 추방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문제는 이 사료들이 대부분 낡은 종이와 파손된 필름에 남아 있어 시각적 정보 자체가 크게 손상돼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당시 서신 특유의 빠른 필체가 겹치며 문자를 온전히 식별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기자가 확인한 스캔본에서도 ‘Bible’ 같은 기본 단어조차 잉크 번짐과 겹침 때문에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수십 년간 ‘존재하되 읽히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던 문서들이 상당하다.

감리교신학대(감신대·총장 유경동) 역사박물관 관장인 소요한 감신대 교수는 2019년 부임 직후 120만쪽이 넘는 방대한 자료의 존재를 확인했다. 대부분은 빛바랜 종이와 파손된 필름에 갇혀 있었다. 소 교수는 “전문 연구자가 온종일 매달려도 수십 쪽 해독이 전부”라며 “혼자 정리하면 200년이 걸린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귀한 믿음의 유산이 여기 있는데, 왜 꺼내 볼 수 없는가’라는 절박함이 그를 움직였다.

200년 걸릴 작업 48시간 만에… 극적인 ‘AI 전환점’

소요한 감신대 교수가 지난달 서울 감신대 청암관에서 유관순 열사의 후손 유혜경씨로부터 전달받은 소장 자료를 정리·분석하고 있다. 소 교수 제공

소 교수는 6개월 동안 스스로 코드를 익히며 AI 모델 개발에 몰두했다. 수천 번의 오류와 중단을 견디는 고독한 시간이었다. 전환점은 지난달 24일 찾아왔다. 그는 자체 개발한 시스템으로 광성중·고등학교가 보유한 무어 선교사 기록 2818쪽을 처리했다. 사람이 한다면 몇 년이 걸릴 기록을 AI는 48시간 만에 해독하고 번역까지 끝냈다.

소 교수는 “번역본이 화면에 쏟아지는 순간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며 “이제 역사의 문을 실제로 열 수 있는 열쇠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단순 해독 넘어 ‘디지털 양화진’ 건설

소 교수의 문제의식은 ‘프로젝트 카이로스(Kairos)’라는 AI 기반 복원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난해한 필기체를 읽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문서를 자동 분류하고 핵심 주제를 추출하며 시대·지역·인물 관계를 연결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파이프라인이다. 파이프라인은 여러 단계를 한 번에 묶어 돌리는 자동 시스템을 일컫는다.

그는 이를 “기록을 다시 호흡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AI는 문서를 읽어낸 뒤 날짜, 누가 누구에게 보냈는지, 어떤 내용인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등을 자동으로 표처럼 정리한다. 인식 정확도가 98%에 이른다는 게 소 교수의 설명이다.

소 교수는 이번 작업을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의 묘역 양화진에 비견했다.

“그들의 믿음과 헌신이 담긴 기록이 도서관과 하드디스크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읽지 않으면 잊히고, 해석하지 않으면 죽은 역사입니다. 디지털 양화진을 조성하는 마음으로 이번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습니다.”

“140년 침묵한 목소리, 다시 들리게 할 것”

감신대는 내년까지 전체 자료의 디지털 스캔을 마치고, 이후 2년 차에 AI 분석 파이프라인을 완성해 전면 무료 공개할 계획이다. 이밖에 한문고어, 한국어 고어 흘림체도 실험중이며 가톨릭 순교 증언집도 수록한다는 각오다. 소 교수는 “140년 동안 침묵했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도록 하겠다”며 “근대사 연구의 문이 새로운 방식으로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소요한 감신대 교수가 지난달 서울 감신대 청암관에서 학생들에게 유관순 열사의 후손 유혜경 씨가 기증한 소장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소 교수 제공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