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 약물을 복용하거나 주사하는 행위인 도핑(doping)은 모든 스포츠에서 가장 엄격하게 금지되는 반칙이다. 심장 흥분제, 근육 증강제 같은 약물은 인간의 신체 능력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경기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선수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국제 스포츠 기구는 고의 여부와 상관없이 출전 금지·메달 박탈·자격정지·영구 제명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
도핑 관리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사이클 선수 크누드 옌센이 약물 부작용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IOC는 1968년 그르노블 동계올림픽부터 도핑 검사를 도입했고, 1999년에는 세계반도핑기구(WADA)를 설립해 국제 기준을 통일했다. 현재는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 기간은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불시 검사와 장기 샘플 보관·재분석이 이뤄진다.
그럼에도 도핑으로 인해 경기가 뒤집히는 일은 여전히 반복된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5개의 메달을 모았던 미국 스프린터 마리온 존스는 금지 약물 사용이 드러나며 모든 메달을 반납했다. 사이클의 ‘황제’로 불리던 랜스 암스트롱은 팀 전체가 가담한 조직적 도핑이 밝혀지며 모든 기록이 삭제되고 평생 자격정지를 당했다. 중국 수영의 영웅 쑨양은 도핑 검사 방해 논란 끝에 CAS로부터 4년 3개월 자격정지를 받아 도쿄·파리 올림픽 출전이 모두 무산됐다.
반대로 도핑 규정 강화가 ‘뒤늦은 정의’를 구현한 사례도 있다. 역도의 전설 장미란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위였지만, 이후 동메달리스트였던 아르메니아 선수가 재검사에서 도핑이 적발되며 2016년 공식 동메달을 받았다. 장미란은 이로써 금은동을)·은(2004)·동(2012)을 모두 획득해 올림픽 3색 메달을 완성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역도 남자 94㎏급의 김민재는 당시 8위였지만 상위 선수들의 잇단 도핑 적발로 은메달리스트로 승격됐다. 같은 대회에서 4위였던 전상균 역시 러시아 선수의 금지약물 위반으로 동메달을 받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4위였던 임정화도 1·2위 선수의 도핑이 드러나며 은메달을 되찾았다.
이처럼 도핑은 한 선수의 명예와 커리어, 더 나아가 국가의 신뢰도까지 좌우한다. 그리고 앞으로 6년간 전 세계가 따를 도핑 기준을 새로 정하는 자리가 다음 달 부산에서 열린다.
12월 1일부터 5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는 세계도핑방지기구(WADA) 총회가 개최된다. 191개국 2000여 명이 참석하는 ‘반도핑 올림픽’으로 불리며, 아시아 개최지는 부산이 처음이다. 이번 총회에서는 2027~2032년 적용될 세계도핑방지규약(Code)과 국제표준(International Standards) 개정안이 최종 승인된다. 도핑 샘플 보존 기간, 재검사 절차, 금지약물 목록, 징계 기준 등 세계 스포츠의 공정성을 규정하는 ‘룰’이 부산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셈이다.
폐회식에서는 WADA의 도핑방지 협력 방향과 선수 보호 원칙을 담은 ‘부산선언’ 발표될 예정이다. 부산시는 이를 기반으로 도핑방지 연구기관 유치, 청소년 클린스포츠 캠프 정례화 등 아시아 도핑방지 허브 도시 전략을 추진할 계획이다.
부산=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