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사법농단’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심에서도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임 전 차장이 “사법부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형사12-1부(재판장 홍지영)는 27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임 전 차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심과 동일한 형량이다.
임 전 차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근무하며 재판에 개입하고 대내외 비판 세력을 탄압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대법원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하던 양 전 대법원장 등과 공모해 박근혜 정권과 거래를 시도했다는 혐의다. 2018년 구속기소 된 그는 2020년 보석 된 뒤 불구속 상태서 재판을 받아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유죄로 인정한 일부 혐의는 무죄로 봤다. 임 전 차장이 헌법재판소 소장 등에게 행정처 개입이 없었다는 ‘거짓 해명’을 하기 위해 허위 자료를 작성·행사했다는 혐의가 무죄로 뒤집혔고, 기획재정부 공무원을 기망해 공보관실 운영비 예산이 반영되도록 한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의 무죄 판단이 유죄로 뒤집힌 부분도 있었다. 행정처 심의관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가면 판매를 중지시킬 법적 압박 수단을 검토하도록 지시한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됐다.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권 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같은 법원 내 소모임을 와해시키기 위해 대응방안을 검토하게 한 혐의도 일부 유죄가 인정됐다.
임 전 차장이 윤리감사관에게 개별 판사의 재산 관계를 확인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혐의, 행정처 심의관에게 메르스(MERS) 관련 민사·행정소송 시의 국가의 법적 책임을 검토해보도록 한 혐의 등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유죄가 인정됐다.
2심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하며 “피고인이 남다른 열정과 추진력으로 장기간 사법행정사무를 수행하였으나, 사법부의 정책 목표와 추진 현안이 시급하고 절박하다는 점에만 몰입한 나머지 원칙과 기준을 위배하여 직무를 수행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의 범행은 사법부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했다”고 말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법부 신뢰를 훼손한 것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고 이 사건으로 500일 넘게 구금되기도 했다”며 “여러 양형 조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형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임 전 차장이 선고받은 형량은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전·현직 법관 중 가장 높은 형량이다.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들에 대한 2심 선고는 내년 1월 30일 이뤄질 예정이다.
윤준식 기자 semip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