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품기 시작한 건 1989년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윤영아(53) 평택대 교수는 친구가 생일 선물로 건넨 휘트니 휴스턴 2집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휘트니 같은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만난 윤영아 평택대 교수는 30여년간의 음악 인생을 꺼내놓았다. 그의 데뷔는 1990년 KBS 청소년 창작가요제. 당시 고3이던 그는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첫 무대를 밟았다. 이듬해 ‘미니 데이트’를 발표하면서 상위권 차트에 오르며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시기였어요. 그때 제 곡이 5위 안에 들기도 했죠.”
전성기 뒤에는 예상치 못한 침체가 찾아왔다. 2000년대 초 연예기획사와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그는 매니저가 출연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거나 과도한 스케줄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기계처럼 노래했어요. 제가 벌어야 할 돈은 중간에서 사라졌고, 아버지의 암 치료와 가족 생활비로 모아둔 돈은 바닥났죠.” 당시 섭외가 들어오면 ‘선불계약’을 이유로 무리한 출연을 요구받았고, 여러 무대가 한꺼번에 잡히는 식의 혹사도 반복됐다.
금전 갈등과 착취적 구조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윤 교수는 “그때는 제 인생이 끝난 줄 알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소송을 택했다. 변호사를 쓸 형편이 안 돼 모든 서류를 혼자 작성했고, 3년 넘는 재판 끝에 승소했다. 그 사이 6년 가까이 방송 무대에 설 수 없었고 국민으로부터 잊혀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고속도로 운전 중 하반신 마비 증상이 와 병원에 40여일 입원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무대에서 밀려난 시간에도 윤 교수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일식 코스요리집과 마트 계산대에서 일했던 순간들을 ‘10시간짜리 무대’로 기억한다. “오늘의 무대는 몇 시간, 이렇게 정해놓고 절대 등이 굽지 않게 서 있었어요. 안 팔리는 과일을 어떻게 팔까 고민하며 목표를 세웠죠.” 대학 강의와 레슨, 뷰티쇼 메인 모델까지 더하면 직업은 네 개였다. 고된 시간 속이었음에도 그는 ‘언제 콜이 와도 무대에 설 준비를 한다’는 마음은 놓지 않았다.
그가 고단한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앙이 있었다. 당시 조운파 작곡가로부터 ‘히트곡’을 받으러 갔다가, 대신 성경구절과 기도를 받았다. 불교 신자로 천수경을 외울 수 있을 만큼 열심이던 그는 “슬프지도 않은데 기도 중에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조운파는 하박국 말씀을 보내며 “10번 읽고 묵상하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그 말씀을 붙들고 재판 서류를 쓰다 하나님을 만났다”면서 “전에는 돈·인기만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기준이 달라졌다”고 회고했다.
2020년 JTBC ‘싱어게인’ 출연은 ‘윤영아’라는 이름을 다시 대중 앞에 세웠다. 윤 교수는 “예전의 저를 기억하는 분들과 새로운 세대가 함께 응원해 주는 걸 보며,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연출가와의 인연으로 시작된 모노드라마 ‘어느 젊지 않은 여가수의 노래’는 필라델피아·뉴욕·뉴저지 등에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작품의 못다 한 이야기를 담은 책 ‘어느 젊지 않은 여가수의 고백’은 초판이 매진돼 재쇄를 앞두고 있다.
인생과 신앙에서 얻은 교훈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급하게, 떠밀리듯 살 때가 많고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그건 영원히 이어질 수 있어요.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인생의 퀄리티가 달라진다고 믿어요.” 그는 “인기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며 “노래가 제 사명이고 기도이자 고백”이라고 밝혔다.
그의 신앙적 모토는 빌립보서 4장 13절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받은 달란트를 끝까지, 다 쓰고 싶어요.”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