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서울 GS아트센터 로비에 벵골 호랑이가 등장했다. 세 명의 퍼펫티어(puppeteer·인형을 조종하는 배우)가 각각 머리, 몸통과 앞다리, 뒷다리와 꼬리를 담당해 한 마리의 호랑이를 연기하는 모습을 시연하는 자리였다. 인형이지만 그르렁거리는 숨소리, 움직이는 귀와 꼬리, 포효하는 주둥이 등이 퍼펫티어와 상관없이 살아있는 호랑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12월 2일 개막해 내년 3월 2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난파된 화물선에서 살아남은 소년 파이가 태평양을 표류하는 227일간의 여정을 담았다. 화물선에 실려있던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도 구명보트에 탔지만, 하나둘 죽고 파이와 리차드 파커라는 이름의 벵골 호랑이만 남게 된다. 호랑이를 비롯해 동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퍼펫 예술은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다.
올 연말 공연계 최고의 화제작 ‘라이프 오브 파이’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2001년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2002년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은 전 세계에서 50개 언어로 번역돼 누적 1500만부나 팔렸다. 2012년 이안 감독 연출로 영화화되면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됐다. 흥미진진한 서사와 철학적 메시지를 CG기술이 뒷받침된 장대한 영상미로 구현한 동명 영화는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등 4개 분야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연극은 2019년 영국 셰필드에서 로리타 챠크라바티의 각색과 맥스 웹스터의 연출, 팀 하틀리의 무대 및 의상 디자인, 핀 콜드웰의 퍼펫 디자인 및 무브먼트 등으로 초연돼 찬사를 받은 뒤 2021년 런던 웨스트엔드에 이어 2023년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올리비에상 5개 부문 수상, 미국에서 토니상 3개 부문 수상 기록을 남겼다.
이번 한국 공연은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라이선스(외국에서 창작된 작품 판권을 수입해 제작) 형태로 공연되는 첫 사례다. 한국 공연 제작사인 에스앤코의 신동원 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파이 이야기’ 무대화 이야기에 반신반의했지만 공연에서 살아 움직이는 리처드 파커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한국 공연을) 결정했다. 그 순간의 환희와 충격적인 감정을 한국 관객과 나누고 싶었다”면서 “이 작품은 그냥 ‘보는’ 공연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하는’ 신비로운 공연”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작품은 뮤지컬이나 연극이라는 정형화된 틀 안에 담기 어렵다. 다양한 무대 장치를 비롯해 조명, 영상, 음악, 퍼펫 등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창적 형식을 갖췄다”고 강조했다.
한국 공연은 파이 역의 박정민과 박강현, 아버지 역의 서현철과 황만익, 어머니 역의 주아와 송인성 그리고 9명의 퍼펫티어 등 27명이 이끌게 된다. 타이틀롤을 맡은 두 배우 모두 공교롭게도 ‘라이브 오브 파이’를 통해 8년 만에 연극에 출연한다. 주로 스크린에서 활동한 박정민은 2017년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뮤지컬계 스타 배우인 박강현은 같은 해 ‘나쁜 자석’에 출연했었다.
이번 한국 공연을 연출한 리 토니 협력 연출가는 “오디션 과정에서 파이 역으로 장난스러우면서도 잘 놀 줄 알고 상상력이 뛰어난 배우를 찾았다”면서 “박정민과 박강현이 자신의 성격을 작품에 녹여내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을 만들어냈다”고 칭찬했다. 이어 “‘라이프 오브 파이’는 희망과 끈기, 인내, 선택에 대한 이야기”라면서 “이 작품의 결말은 두 가지인데, 어느 쪽을 믿을지는 관객의 선택이다.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했던 선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