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성경 8만권 北배달 작전 “소련 때 빚 갚아야”

입력 2025-11-26 15:00 수정 2025-11-26 16:03
A선교회의 프로젝트 총괄 H대표가 인터뷰 도중 자신이 과거 구소련 시절 받았던 비밀 성경과 유사한 형태의 소형 성경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통일선교계가 제3국을 우회하는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스위스·오스트리아에 거점을 둔 A선교회가 러시아어 학습 교재 등으로 만든 성경 8만권을 제작해 시베리아 경로를 통해 북한 보급에 나선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과거 구소련 시절 비밀 성경으로 신앙을 지켰던 디아스포라(본래 살던 땅을 떠나 다른 곳에 흩어져 사는 민족이나 집단)들이 주축이 된 이 단체는 “과거 소련 치하에서 우리가 목숨 걸고 성경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북한 주민들에게 그 진실을 전할 차례”라며 최근 북·러 밀착 기류를 선교의 기회로 삼았다.

A선교회가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 중인 그림 성경의 일부. QR코드가 삽입되어 있어 스마트폰 등으로 오디오 성경이나 추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검은 표지에 필기 노트까지… 완벽한 ‘어학용 수첩’

이날 국민일보가 단독 입수한 A선교회의 프로젝트 문건에 따르면, 이들은 총 8만부 규모의 대북용 성경 제작에 착수했다. 성경전서가 아닌 휴대하기 좋은 얇은 형태의 쪽복음 위주로 제작된다. 러시아어-북한어 대조 형태로 제작되며 누가복음·사도행전 2만권, 창세기·출애굽기 2만권, 신약전서 1만권, 어린이 그림 성경 2만권, 달력 등으로 만들어진다.

이들이 성경을 여러 권으로 쪼개고 외형을 변형한 이유는 철저한 보안 때문이다. 제작되는 성경은 언뜻 보면 시중에서 파는 일반 업무용 수첩이나 어학 교재와 구별하기 힘들다. 이번 성경은 왼쪽 페이지에 러시아어, 오른쪽 페이지에 북한식 조선어를 나란히 인쇄해 ‘러시아어 교재’로서의 기능도 한다. 일반적으로 북한 성경은 겉표지는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뺀 검은색 무지로 제작되며, 책의 앞부분에는 실제 필기가 가능한 노트 지면을 배치하기도 한다. 부피가 작은 쪽복음 형태라 옷 품이나 가방 깊숙한 곳에 휴대하기도 용이하다.

대북용 성경의 겉표지.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배제하고 검은색 무지로 제작되었으며, 겉면에는 ‘수첩’이라는 한자가 금박으로 인쇄되어 있어 일반 업무용 수첩처럼 보인다. 왼쪽 책은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은 만화 형식의 기독교 서적 ‘메시아’. 모퉁이돌선교회 제공

북한 주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조선어(문화어)로 번역된 북한어 성경. 대북 선교 단체들은 북한의 언어 습관에 맞춘 성경을 제작해 보급하고 있다. 모퉁이돌선교회 제공

프로젝트 관계자는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며 “이 책은 보위부의 검열 과정에서 성경이 아닌 유용한 학습 도구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소지 명분이 된다. 최근 북한이 러시아와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러시아인들이 보는 성경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고 설명했다.

“소련 지하교회 시절 받은 ‘생명의 빚’ 갚는다”

이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축 멤버들은 과거 구소련 치하에서 공산당의 감시를 피해 지하교회 신앙을 지키다, 체제 붕괴 후 자유를 찾은 ‘구소련권 디아스포라’들이다. 프로젝트 총괄 H대표는 국민일보가 입수한 인터뷰 영상에서 “14살 때 서방에서 비밀리에 반입된 작은 성경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며 “과거 ‘철의 장막’ 속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누군가 목숨을 걸고 성경을 보내줬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회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그 ‘복음의 빚’을 제2의 소련과 같은 북한에 갚을 차례”라고 덧붙였다.

20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주택 리모델링 작업에 투입된 북한 노동자 모습. 국민일보DB

보급 경로는 한국을 거치지 않는 ‘제3의 루트’다. 러시아 인접국인 제3국에서 인쇄를 한 다음, 완성된 서적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트럭 등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등 북·러 접경 지역으로 집결된다. 이곳에 비축된 8만여권의 성경은 러시아 전역의 공사 현장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에게 우선 전달될 예정이다.

제3국서 인쇄해 시베리아 횡단… “2억여 부족”

프로젝트는 궤도에 올랐지만, 한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A선교회에 따르면, 이번 프로젝트의 총예산은 약 35만 달러(약 5억1200만원) 규모다. 현재 유럽 교회들의 후원으로 약 20만 달러가 모금됐지만, 인쇄 및 운송을 마무리하기 위한 15만 달러(약 2억2000만원) 가량의 재정이 부족한 상태다.

김정은(왼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오른쪽)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평양 정백사원의 전경. 2001년 8월과 2002년 8월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중 러시아 정교회 성당 방문이 계기가 되어 정백사원이 건립됐다. 국민일보DB

인적 지원도 시급하다. 이들은 종이 성경 외에도 스마트폰 사용이 가능한 북한 엘리트층을 겨냥해 ‘북한어 오디오 성경 애플리케이션’을 개발 중이다. A선교회 관계자는 “기존 러시아어 성경 앱에 북한어 텍스트와 오디오를 탑재해야 하는데, 러시아어와 북한어에 모두 능통하면서 IT 기술을 갖춘 전문 인력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한국 교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모퉁이돌선교회 “선교 타깃, ‘땅’에서 ‘사람’으로 이동”

전문가들은 이번 프로젝트가 물리적 한계에 봉착한 대북 선교의 현실적인 돌파구라고 본다. 지난 40년간 북한 성경 배달 10만여권을 해내며 이 같은 사역을 도맡아 해온 모퉁이돌선교회는 최근 선교의 대상을 ‘북한 지역’에서 ‘북한 사람’으로 확대했다. 선교회 관계자는 “국경 봉쇄로 북한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막힌 상황에서, 중국이나 러시아, 중동 등 해외에 체류 중인 북한 노동자와 유학생들에게 직접 성경을 전달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평양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 ‘정백사원’ 내부 모습. 북한 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기독교 시설 중 하나다. 국민일보DB

이 관계자는 “북한이라는 영토에 성경을 밀어 넣는 방식에서 벗어나,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성경을 전해 그들이 귀국할 때 스스로 ‘말씀’을 가지고 들어가게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0여년 전 한 북한군 장교 해외에서 우연히 우리가 보낸 성경을 읽고 회심해, 지금은 함께 일하는 사역자가 됐다”며 “1999년 약 9만명 수준이던 북한 지하교회 성도가 2020년 기준 약 20만~25만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추산된다. 외부에서 전해진 성경 한 권이 북한 내부로 흘러들어가 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례가 분명히 있다”고 전했다.

이 선교회 역시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아 배달 예정인 5만권 중 5000권을 먼저 배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이를 위해 단체는 한국교회의 기도와 참여를 요청하고있다. 유럽과 제3국에 체류 중인 북한 유학생 및 노동자들에게 성경을 선물해,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가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모퉁이돌선교회 관계자는 “북한 주민 대다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성경 표지조차 보지 못한다”며 “김일성 일가 주체사상에서 금기하는 성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은 복음 전파를 넘어, 억압된 영혼에 자유를 선물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