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 91세로 별세…“연기는 완성이 없다”

입력 2025-11-25 10:53 수정 2025-11-25 11:47
배우 이순재. 뉴시스

일평생 연기에 헌신해 국민적 사랑을 받은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가 25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이날 새벽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고령에도 철저한 건강관리로 방송, 영화, 연극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해 온 고인은 지난해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에 출연했다. 지난해 10월 건강 악화로 연극에서 중도 하차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으나 호적상으로는 1935년생인 고인은 4세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할아버지를 따라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던 초등학교 시절 해방을 맞았고, 고1 때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서울대 철학과에 다니다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에 크게 감명받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고인은 한국 방송 역사 그 자체였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해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됐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140편의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았다. 시청률 65%를 기록한 ‘사랑이 뭐길래’(1991∼1992)에서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표상인 캐릭터 ‘대발이 아버지’ 역으로 당대 공감을 얻었다.

그의 연기 열정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허준’(1999) ‘상도’(2001) ‘이산’(2007) 등 사극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묵직한 연기를 펼쳤다. 70대에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는 근엄한 기존 이미지를 벗어던진 코믹 연기로 사랑받았다. 연기뿐 아니라 예능 ‘꽃보다 할배’(2013)에서도 활약했는데, 지치지 않는 체력과 나이를 잊은 열정을 보여줬다.

배우 이순재. 뉴시스

팔순을 넘어서도 연극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리어왕’에서는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량을 완벽하게 소화해 찬사를 받았다. 2023년에는 연출자로 데뷔해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후배 배우들과 함께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제14대 국회의원(민주자유당)을 지내는 등 잠시 정치권에 몸을 담기도 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순재는 생전 인터뷰에서 “연기라는 예술적 창조 행위는 평생 해도 끝이 없고, 완성이 없다” “배우라면 맡은 배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등 연기 소신을 밝혀 왔다. 지난해 KBS 역대 최고령 연기대상을 받은 뒤에는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감사하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각계에서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은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큰 별”이라며 “고인의 연기에 대한 철학과 배우로서의 자세, 그리고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인품은 수많은 후배에게 귀감이 됐고,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남기신 작품과 메시지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질 것”이라고 애도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20분, 장지는 경기도 이천 에덴낙원이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