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루 “쇼팽 콩쿠르 재도전, 모든 사람이 말렸지만…”

입력 2025-11-24 17:17
19회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가 24일 L7 강남 바이 롯데호텔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부모님을 포함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말렸지만 쇼팽 콩쿠르를 통해 제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싶었어요.”

지난달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9회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에릭 루(27)가 24일 L7 강남 바이 롯데호텔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콩쿠르에 대한 소회와 자신의 음악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국계 미국 피아니스트 루는 2015년 조성진이 우승했던 쇼팽 콩쿠르에 17세로 출전해 4위에 올랐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출전해 재도전자 중 최초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루는 “재출전을 처음 떠올린 것은 재작년 무렵이지만, 지난해 초쯤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마지막 출전 기회라고 생각해서 도전했다”고 되돌아봤다. 이어 “10년 전 쇼팽 콩쿠르에 나갈 때는 너무 어렸었다. 10년 동안 음악적으로 많이 성장하면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은지 확신이 생긴 것이 재출전의 배경”이라면서 “재도전자에게 제도적인 불이익은 없지만, 사람들의 심리에서 오는 ‘기대치’가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KBS교향악단의 제820회 정기연주회에서 에릭 루가 연주를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루는 재도전한 제19회 쇼팽 국제 콩쿠르 당시 본선 3라운드에선 손가락 부상과 감기로 경연 순서를 조정해야 했다. 그는 “바르샤바에 도착한 순간부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라운드 무대가 가장 긴장될 줄 알았는데, 3라운드가 최악이어서 기권하려고도 생각했었다”면서 “매니저의 격려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루는 스승인 당타이손에 대한 존경심도 드러냈다. 당타이손은 1980년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뛰어난 교육자로도 알려진 그의 제자에는 제18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 브루스 리우도 포함돼 있다. 루는 “13세 때부터 21세까지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는 단순히 뛰어난 쇼팽 전문가가 아니라 정말 훌륭한 음악가다. 음악적 직관이 남다르며 연주에 대한 디테일이 정교해서 자연스럽게 내 기준도 높아진 것 같다”면서 “쇼팽은 연주할 때 ‘생각’보다 ‘느낌’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쇼팽의 음악은 근본적으로 감정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루의 우승 이후 조성진은 인스타그램에 축하 글을 올렸다. 조성진은 이번 쇼팽 콩쿠르가 열리는 바르샤바를 방문했었다. 루는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단에 자신의 스승인 케빈 커너와 미쉘 베로프가 있는 등 겸사겸사 왔겠지만, 나를 많이 응원해 줬다.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됐다”면서 “조성진은 또 10월 말 나의 베를린 필 데뷔 무대에 와서 다시 한번 축하해 줬다”고 밝혔다.

19회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가 24일 L7 강남 바이 롯데호텔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루는 지난 21일 레너드 슬래트킨이 지휘한 KBS 교향악단과의 협연에서 쇼팽 콩쿠르 결선 당시 선택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 들려줘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오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쇼팽 콩쿠르 5위 입상자 빈센트 옹과 함께하는 무대에 이어 내년 2월 3일 바르샤바필과 함께 쇼팽 콩쿠르 1~6위 입상자 출연하는 ‘쇼팽 위너스 콘서트’에 출연할 예정이다. 그는 “한국에는 2016년 조성진과 함께 쇼팽 위너스 콘서트의 일환으로 처음 온 이후 2018년 리즈 콩쿠르 우승자로서 공연하는 등 여러 차례 왔다”면서 “처음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편안하다. 한국 관객들은 연주자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느낌이 든다”고 피력했다.

최근 클래식계에서 루를 비롯해 중국(계) 연주자들의 약진은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뛰어난 연주자들이 나오고 있지 않느냐. 어쩌면 한국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비결이 궁금하다”고 반문하면서 “아시아에서 아이들의 교육, 특히 음악교육에 있어서 부모의 관심과 헌신이 크다. 어릴 때부터 진지하게 음악을 배우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위권 인재가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글·사진=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