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대 원전단지가 있는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자리한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이 올해 개원 15년을 맞았다. 방사선 및 방사성동위원소 이용진흥법에 따라 한국원자력의학원의 분원으로 설립된 이 병원은 동남권 주민에게 첨단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방사선 의학 연구와 방사선비상진료를 함께 수행하는 공공의료기관이다. 출범 당시만 해도 ‘방사선 전문 병원’ 정도로 인식됐지만, 지금은 기장 방사선의과학 산단의 축을 이루는 첨단 암치료·미래산업 허브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2010년 7월 문을 열었다. 설립비 1750억원 중 410억원을 부산시와 기장군이 부담하며 지역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당시 동부산권에는 대형 공공병원이 부족했고 방사선 비상진료 체계도 취약했다. 의학원은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립됐다. 동남권 주민에게 첨단 암치료를 제공하고, 방사선 및 방사성동위원소의 의학적 이용·연구개발을 수행하며 방사능 재난 시 현장 방사선비상진료를 동시에 맡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병원이었다.
지난 15년 동안 병원은 공공의료 역할을 꾸준히 넓혀왔다. 코로나19 대 유행기에는 부산에서 두 번째 전담병원으로 전환해 지역 방역을 책임졌고, 지역 필수 의료도 지속해서 보강해 왔다. 올해는 의료서비스 고도화를 위해 민·관 예산 53억원을 투입해 심뇌혈관센터를 열고 최신 MRI 장비를 확충했다. 응급의료기관 평가에서도 전국 228곳 중 1위를 기록했다. 소아청소년과 야간진료, 지역 유일의 음압격리병실 등을 운영하며 ‘동남권 응급·감염병 거점 병원’이라는 평가도 얻었다.
무엇보다 의학원은 수익이 크지 않은 치료도 차례로 도입해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간암·폐암 치료에 쓰는 암 냉동제거술(크라이오어블레이션), 복강 내 항암온열요법(HIPEC), 방사선 색전술처럼 기술 난도는 높고 장비·인력 부담은 큰데 반해 수익성은 낮은 치료들이 대표적이다.
이창훈 동남권원자력의학원장은 “공공의료기관이기 때문에 수익이 남지 않아도 해야 하는 치료가 있다”면서 “암 냉동제거술 같은 치료는 환자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선택지이기 때문에 도입해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의학원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조사에서 환자 본인부담 의료비가 전국 최저권으로 나타났다. 경제성보다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의료’를 기준으로 진료를 이어온 결과다.
■ 원전 해체 시대…방사선 안전 책임지는 지역의 ‘방패’
원전 지역이라는 기장의 특수성은 방사선비상진료 기능에서 드러난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본원인 한국원자력의학원(서울)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방사선비상진료센터를 운영한다. 평상시에는 지역 학교·마을을 찾아 방사선 재난 대응 교육을 실시하고, 사고나 해체 공사 과정에서 피폭이 발생하면 현장 대응과 제염, 정밀 검사까지 맡도록 설계돼 있다.
고리1호기 영구정지와 해체가 본격화되면 작업자와 인근 주민 대상 피폭 모니터링 수요도 늘어날 전망이다. 김법종 병원장은 “원전 해체가 본격화되면 피폭 감시와 정밀검진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전 인근 방사선 안전망의 중심이 되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 중입자+양성자, 국내 유일 ‘입자치료 투트랙’ 구축
의학원의 미래 전략은 중입자와 양성자, 두 개의 입자치료를 모두 갖춘 국내 최초의 ‘투트랙 암 치료 허브’ 구축이다.
의학원 뒤편 산자락에 들어서는 서울대병원 중입자치료센터와 발맞춰 입자치료 투트랙 허브를 만드는 구상이다. 중입자 치료는 탄소 이온을 빛의 70% 속도로 가속해 깊은 종양에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폐암·간암·뇌종양·골육종 등 난치암에 효과가 높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이에 맞춰 양성자치료센터 구축을 공식화했다. 지난 3일 부산시·기장군·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BISTEP·비스텝)과 협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실행 단계에 돌입했다.
중입자는 방사선 저항성 종양이나 재발성 종양에 사용해 강력한 ‘소 잡는 칼’로 비유된다. 반면 양성자는 암과 붙어 있는 뒤쪽 정상조직 손상이 거의 없어 소아암·안구종양 등 정밀성을 요구하는 시술에 적합하다. 중입자와 비교해 양성자는 ‘닭 잡는 칼’로 설명한다. 두 기술은 치료 영역이 완전히 달라 서로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김진우 전략기획부장은 “중입자와 양성자를 동시에 갖추는 지역은 한국에서 기장이 유일하다”며 “부산·울산·경남 환자들은 더 이상 서울까지 갈 이유가 없어지고, 지역 의료격차 해소 효과도 클 것”이라고 말했다.
■ 기장만이 가진 ‘방사선 의과학 클러스터’
부산시는 동남권방사선의과학 산단을 국내 최초의 방사선 의학·산업 융합 단지로 키우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산단에는 서울대병원 기장 중입자치료센터,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양성자치료센터(구축 예정), 수출용 신형 연구로(동위원소 생산), 동위원소활용연구센터(동위원소 활용 연구), 파워반도체상용화센터(중성자 도핑·내방사선 테스트) 등 5대 핵심 시설이 집적된다.
박동석 부산시 첨단산업국장은 “기장 산단의 핵심은 중입자·양성자 같은 첨단 치료뿐 아니라 중성자 도핑을 활용한 전력반도체와 방사선 테스트 인프라에 있다”며 “이미 핵 보유국 기업들을 포함해 해외 반도체·방산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고, 산업계에서도 ‘한국에 이런 도핑·입자선 인프라가 생기느냐’며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밑그림은 비스텝이 그리고 있다. 비스텝은 내년 3월까지 양성자치료센터 사전기획과 국가핵심기술 선도프로젝트 기획을 수행하며 전체 로드맵을 구축 중이다. 이후 2026년 상반기 예비타당성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기장 단지는 입자치료 시설만 갖춘 공간이 아니다. 신형 연구로에서는 의료용·치료용 동위원소를 생산하고, 의학원 내 GMP 제조시설에서는 방사성 의약품을 개발한다. 반도체·우주방사선 연구용 빔라인도 구축될 예정이어서 “암치료–동위원소–반도체–우주방사선”을 하나로 묶는 국내 유일 플랫폼이 된다.
문제는 돈이다. 양성자치료센터는 가속기와 쉴딩시설 등을 포함해 수천억원이 들어간다. 의학원이 자체 용역으로 따져본 비용 대비 편익(B/C)은 0.72이 나왔다. 숫자만 놓고 보면 ‘경제성 없음’ 판정이다. 그러나 김 부장은 “의학원 설립 당시에도 B/C가 낮았지만, 지금은 지역 공공의료의 핵심축이 됐다”며 “의료격차 해소·원전 수용성·신산업 효과까지 감안하면 도전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 우주 방사선의학까지…연구지대로 진화
양성자 가속기는 암 치료를 넘어 반도체·우주항공 연구에도 쓰인다. 고에너지 양성자 빔을 낮춰 환자 치료에 쓰고, 남는 빔은 전력반도체 웨이퍼 도핑이나 우주방사선 모사 실험에 활용할 수 있어서다.
이에 의학원은 최근 울산과학기술원(UNIST)과 우주 방사선의학 연구 협약을 체결했다. 양 기관은 기장의 방사선 인프라에 AI·로봇·우주과학 기술을 결합해 방사성 의약품·첨단재생의료 상용화, 우주 환경에서의 인체 방사선 영향 분석, 우주 의료시스템 국산화 등을 공동 추진할 계획이다.
김영부 비스텝 원장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암치료–동위원소–반도체–우주방사선 연구 융합 단지로 성장할 잠재력이 크다”며 “동남권의 미래산업 지도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 병상 300→500…또 한 번의 성장 준비
의학원은 입자치료 도입과 원전해체 대응을 위해 현재 300병상 규모를 500병상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암환자 장기치료, 피폭 감시, 심혈관·응급 환자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인력·시설 확충도 병행한다.
이 의학원장은 “동남권 주민이 서울로 가지 않아도 되는 의료환경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미래 의학원은 지역의료·방사선 의학·신산업을 잇는 허브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