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오페라발레의 전막 내한공연이 다시 이뤄진다면 ‘지젤’로 오고 싶다.” 지난해 7월 파리오페라발레 에투알(수석무용수) 박세은이 동료들과 함께한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 갈라 2024’ 공연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것이다. 한 해 전 30년 만에 성사된 파리오페라발레 내한공연이 ‘지젤’이었지만, 박세은은 당시 출산한 지 2개월밖에 안 된 상태여서 무대에 복귀할 수 없었다. 사실상 2021년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에투알로 승급한 박세은을 염두에 두고 LG아트센터가 파리오페라발레를 초청했지만, 막상 박세은이 출연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한국에서 ‘지젤’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컸던 박세은이 이번에 국립발레단과 손을 잡았다.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파리오페라발레가 1991년 ‘지젤’ 150주년을 기념해 파트리스 바르(1945~2025)가 재안무한 버전을 채택하고 있다. 박세은은 12~16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지젤’ 공연 가운데 13일과 15일 두 차례 타이틀롤로 출연했다. 지난해 11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기민과 함께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 동반 출연했던 박세은은 이번에 김기완과 호흡을 맞췄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완은 박세은과 학창 시절 친구 사이인 데다 김기민의 형이기도 하다
낭만발레의 대표작 ‘지젤’은 장 코라이와 쥘 페로가 아돌프 아당의 음악을 가지고 1841년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초연했다. 1막은 심장이 약한 시골 소녀 지젤이 알브레히트를 동네 청년으로 알고 사랑했다가 이미 약혼녀가 있는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미쳐서 죽음에 이르는 비극을, 2막은 지젤이 처녀귀신 윌리가 된 이후에도 윌리들과 그들의 여왕 미르타로부터 알브레히트를 지켜내는 숭고한 사랑을 그렸다. 지젤 역의 발레리나가 1막과 2막의 상반된 캐릭터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15일 관람한 공연은 박세은이 왜 그토록 ‘지젤’을 한국에서 선보이고 싶었는지 이해하게 했다. 박세은은 1막 초반 천진난만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등장해 후반에 알브레히트의 거짓말에 그토록 상처를 받고 미쳐버리는지 자연스럽게 설득시켰다. 또한, 광기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옛사랑을 회상하는 모습이 단순할 정도로 진정한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의 쓰라림을 슬프게 표현했다.
하지만 2막에서 윌리로 등장하는 박세은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무대를 장악했다. 1막에서 심장이 약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움직일 수 없었던 지젤은 윌리가 되면서 오히려 움직임에서 활기를 띈다.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채 높이 뛰는 박세은의 점프는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윌리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그려냈다. 그러면서 경건함을 보여주는 표정은 내면에 지젤의 용서와 희생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1막도 좋았지만 2막이야말로 불멸의 사랑을 보여주는 ‘지젤’의 핵심을 박세은만의 기량과 연기력으로 보여줬다.
사실 박세은은 한국에 오기 직전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지젤’에 출연했다. 파리오페라발레는 2025-2026시즌 개막작으로 ‘지젤’을 24회 올렸는데, 에투알 다섯 커플이 4~5회 무대에 섰고 프르미에르 당쇠즈/당쇠르 한 커플이 1회 출연했다. 박세은은 제르망 루베와 함께 5회 출연하는 한편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다. 오프닝 무대와 피날레 무대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박세은이 지젤 역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이번 ‘지젤’ 공연이 끝난 후 현지 평단도 박세은에 대한 호평을 쏟아냈다.
이날 국립발레단의 ‘지젤’에서 돋보이는 것은 윌리들의 군무였다. 윌리들은 부정한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죽은 영혼인 만큼 지젤의 사랑과 대비돼 초현실적이면서도 차가운 긴장감을 자아냈다.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아라베스크 자세로 무대를 가로지를 때 박수가 절로 나왔다. 특히 윌리들의 여왕인 미르타를 연기한 안수연은 냉정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작품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반면 아쉬웠던 것은 알브레히트를 연기한 김기완이다. 그동안 부상 때문에 국립발레단의 최근 공연에서 제외됐었던 김기완의 복귀작이었던 만큼 기대가 컸다. 하지만 사랑과 신분 사이에서 고민하는 알브레히트를 표현하는 김기완의 이날 모습은 아쉬움을 자아냈다. 아무래도 공연을 앞두고 다시 종아리 근육 부상을 당하면서 이날 점프, 회전 등의 테크닉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특히 2막에서 알브레히트가 펼치는 대표 동작인 앙트르샤 시스가 부족한 게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루엣을 돌 때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모습은 그가 고통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