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없다고 잊혀져선 안돼…‘순국선열의 날’ 맞아 서훈심사 개선 촉구

입력 2025-11-16 10:10 수정 2025-11-16 10:18
백태현(사진) 경남도의원이 "기록 멸실 시기에도 독립운동은 존재했다"며 '독립운동가 서훈심사 기준 개선 촉구 건의안'을 발의했다. 경남도의회 제공

일제강점기 기록 말살 정책으로 인해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서훈심사 기준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백태현 경남도의원(창원2·국민의힘)은 ‘순국선열의 날(17일)’을 맞아 독립운동 기록이 멸실돼 서훈 심사에 배제되는 사례를 바로잡기 위한 ‘독립운동가 서훈심사 기준 개선 촉구 건의안’을 최근 발의했다.

객관적 기록이 사라진 역사적 특수 상황을 반영해 서훈 심사 제도의 합리적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 의원은 “보훈심사는 객관적 근거에 기초해야 한다는 원칙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구를 통해 1944~1945년 사이에 재판·수형 기록을 대거 폐기한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계에 따르면 일제는 1944년 ‘결전비상조치요강’을 통해 ‘종이 자원 절약’을 명목으로 기록 보존연한을 1년까지 단축해 체계적으로 기록 폐기를 시작했다. 이어 패망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일본 육군대신이 조선총독부를 포함한 전 기관에 지령을 내려 고등경찰·법무 계통 기록을 즉시 폐기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1944~1945년 전후로 투옥됐던 독립운동가들 중 일부는 수형기록 부재로 서훈이 기각됐고, 이후 향토사 기록이나 당시 신문보도 등 민간기록물을 근거로 재심사를 요청해도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경남 창원 지역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한 백정기·오경팔 선생의 사례가 있다. 당시 이들은 ‘청년독립회’를 조직해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독립만세 벽보 부착 활동을 펼쳐 고문과 투옥을 겪었다. 백 선생은 출소 후 독립을 보지 못한채 유명을 달리 했으나 형무소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두 차례(2005년, 2024년) 서훈이 기각됐다.

백 의원은 건의안에서 기록멸실 시기를 특정해 예외 심사 조항을 신설하고, 공공기록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다수의 대체자료(신문기사, 구술기록, 향토사 등)를 통해 사실관계가 교차 입증되면 서훈에 반영할 수 있도록 제도화할 것을 촉구했다.

또 이 시기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된 인물을 재심사해 누락된 공적을 바로잡을 것, 향후 유사한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지역자료·구술기록의 체계적 DB화와 공신력을 확보할 것을 요구했다.

백 의원은 “국가보훈부가 시기별 기록멸실 실태를 고려한 예외 심사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며 “기록 마저 없는 시기에 활동한 분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분들”이라고 강조했다.

창원=이임태 기자 si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