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이성구 엔씨소프트 부사장은 14일 게임전시회 ‘지스타 2025’ 현장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근본적으로 잘못한 부분이 많았다”면서 “이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부사장은 짧은 인터뷰 시간 동안 ‘변화’라는 단어를 5번 이상 사용했다. “잘못했다” “업보가 있다” “고쳐야 한다” “인식 변화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같은 반성적 표현도 숨기지 않았다. 엔씨소프트의 관행적 문제를 스스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 부사장은 ‘pay to win’ ‘가챠’ 방식으로 비판을 받아온 모바일 리니지 시리즈를 만든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지스타에서 공개된, 그가 개발 총괄을 맡은 ‘호라이즌 스틸 프론티어’는 트리플A급 신작으로 기존과는 사뭇 다른 성격의 게임이었다.
이 부사장은 본래 미디어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인물이다. 이번 지스타에서 보여준 행보는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신작 소개를 위해 직접 단상에 섰고, 이후에는 미디어와도 적극적으로 만나 소통했다.
마주 앉은 이 부사장은 한편으론 담담했지만 또 어떤 순간엔 오래 쌓아둔 말을 비로소 꺼내놓는 듯한 후련함과 결심이 묻어났다. 그는 “입사 전부터 콘솔을 무척 좋아하는 게이머였고 루리웹에서 살다시피 했던 사람”이라며 “이젠 회사가 변해야 하고 그 한가운데에 제가 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오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는 듯한 솔직한 화법이 인터뷰 내내 이어졌다.
“쌓아온 업보다… 인식 바꾸려면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이 부사장은 그동안 엔씨소프트를 향해 쏟아진 비판을 단순한 외부 공격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쌓아온 업보’라고 표현하며, 회사가 먼저 변화하지 않으면 어떤 글로벌 도전도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스타 부스를 돌아본 뒤 “리니지 시리즈와 비교하는 시선, 한국 회사·엔씨라는 것에 대한 해외 유저들의 부정적 인식을 보며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인식의 변화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우리가 잘못한 부분이 많았고 소통하지 않은 관행이 너무 오래 이어져 왔어요. 예전에는 운영이 오만하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 ‘너네 게임도 못 만든다’는 말까지 들리더라고요.”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한 주제는 ‘소통 부재’였다. 그는 “오해를 풀 기회가 있어도 소통하지 않았다. PC 시절부터 이어진 관성적 침묵이 큰 문제였다”고 돌아봤다.
이 부사장은 유저들의 냉혹한 평가와 엔씨가 만드는 게임에 대한 편견에 대해 “우리가 자초한 실수도 있었다”며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신작 ‘아이온2’, ‘신더시티’, ‘호라이즌 스틸 프론티어’를 언급하며 “기술력은 여전히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동시에 회사의 마인드도 변해가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호라이즌 팬덤이 제일 무섭다… ‘엔씨가 망쳤다’는 말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아”
이번 지스타 최대 화제작은 엔씨소프트와 소니가 협업한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호라이즌 스틸 프론티어’다. 현장은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세계적인 IP ‘호라이즌’을 엔씨가 재해석한다는 소식에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프로젝트 총괄자인 이 부사장은 이를 “가장 무섭고 또 가장 설레는 프로젝트”라고 표현했다.
“저는 콘솔 게임을 하며 자란 사람입니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살다시피 했고, 요즘 세대는 잘 모를 MSX(재믹스)나 패미컴 같은 게임을 온종일 하던 게이머였죠. 자연스럽게 플레이스테이션도 즐겼고 특히 소니 산하 게릴라 게임즈의 ‘호라이즌’ 시리즈는 큰 감명을 줬습니다. 게릴라의 이전작인 ‘킬존’도 정말 좋아했습니다.”
이 부사장은 호라이즌 IP 기반 MMO 개발을 위해 직접 움직였다. 소니에 지인이 있었던 그는 “게릴라를 만나고 싶다, MMO를 꼭 해보고 싶다”고 수차례 의사를 전달했다. 이후 계속된 미팅 끝에 개발진은 엔씨의 진심을 확인했다고. 이 부사장은 “IP에 대한 애정과 MMO 제작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전달했다”고 회상했다. 게릴라 게임즈의 수장은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엔씨소프트에 호라이즌을 맡겼다.
이 부사장이 현재 느끼는 감정은 막중한 책임감이다. 게임을 공개한 지스타 첫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 커뮤니티의 반응을 밤새 살폈다고 한다. 액션 비주얼, 조작감, 원작 고증 등에 대한 우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부담이 큽니다. 제일 무서운 건 호라이즌 팬덤이죠. 소니와 플레이스테이션을 사랑하는 팬들이 ‘엔씨가 망쳐놨다’는 평가를 하게 되는 상황만큼은 절대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압박이 있지만, 잘해낼 수 있다는 믿음도 있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도전은 말로만 해선 안 된다… 회사 시스템이 변해야 한다”
이 부사장이 이날 강조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조직 문화’다.
“리니지 계열이 승진에서 유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장려하지 않는 구조였죠. 실패해도 괜찮다는 분위기가 조직을 정체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스템은 지금 바뀌고 있습니다.”
글로벌 전략에 대해서도 그의 단호한 어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말만 글로벌 도전이라 하고 실제 행동은 국내 중심이면 안 됩니다. 게임스컴 같은 해외 쇼케이스를 꾸준히 나가야 합니다.”
이 부사장은 “엔씨는 지금 위기”라면서 “이를 극복하려면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는 것 말고는 없다. 회사가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또한 글로벌 동시 론칭이 어려웠던 구조적 문제를 뜯어 고치는 중이라면서 “초기 단계부터 철저히 글로벌 시장을 계획하지 않으면 나중가서 개발팀이 지치고 무너진다”고 강조했다.
이 부사장은 엔씨소프트의 오랜 이미지였던 ‘전쟁·과금 중심’ 구조에 대해서도 분명한 방향 전환을 공언했다.
“소위 ‘쟁 피로감’이 있습니다. 리니지는 리니지대로 잘하면 되고, 새로운 게임은 완전히 다른 노선을 갈 겁니다.”
앞으로의 주요 게임은 PvE·협력 중심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그는 “모든 게임을 리니지 시스템으로 복제하는 구조는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과금 모델, 밸런스, 콘텐츠 구축 등에서도 “우리의 강점은 밸런스고, 부족했던 영역은 다시 세워야 한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장르의 기회 열겠다… 개발자가 능력 발휘할 환경 필요”
서브컬처, TCG, 콘솔 패키지 게임 등 다양한 장르 확장도 진행 중이다.
“원래 좋아하는 게임은 ‘파이널 판타지’, ‘드래곤 퀘스트’ 같은 RPG였습니다. 이제는 그런 장르에도 도전하고 싶어요. 적절한 인력과 환경만 갖춰지면 지금이 콘솔 게임을 만들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봅니다.”
이 부사장은 “엔씨소프트가 더 이상 리니지 성공에만 의존하는 회사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를 스스로 발굴하는 회사로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스타 현장을 찾은 유저들의 반응에 고마움을 전했다.
“영상관 앞에 게이머들이 그렇게 줄 서 있는 걸 보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로 보면 되는데 직접 와서 보고 박수까지 쳐주더라고요.”
인터뷰를 마치며 이 부사장은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적어도 ‘마음에 안 들어도 개발력은 좋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저들이 인정하는 좋은 게임을 결과물로 보여주면 엔씨가 변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지 않을까요.”
부산=이다니엘 기자 d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