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과거 성 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과 친분을 유지할 당시 이미 그의 범죄 행위를 알고 있었고 범죄 가담 개연성도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의 이메일이 12일(현지시간) 공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기극”이라며 격노했고, 백악관은 중상모략이라고 반발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이날 미 하원 감독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이런 내용이 담긴 이메일 3통을 ‘엡스타인 파일’에서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메일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2011년 4월 여자친구이자 공범인 길레인 맥스웰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피해자가 “그(트럼프 대통령)와 함께 내 집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며 “그는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짖지 않은 그 개가 트럼프라는 것을 알아두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맥스웰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답장했다. 맥스웰은 현재 교도소에 복역 중이고 지난 7월 토드 블랜치 법무부 부장관과의 면담에서 트럼프가 엡스타인의 범행에 직접 관련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이 때문에 사면설이 계속 나왔다.
엡스타인은 트럼프가 정치인으로 나선 뒤인 2015년 작가 마이클 울프와도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이메일로 교환했다. 울프는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이 있던 그해 12월 15일 엡스타인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앞으로 언론이) 트럼프에게 너와의 관계에 관해 물어볼 것”이라고 말했다. 엡스타인은 “그(트럼프)를 위한 답변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라고 묻자 울프는 “그가 스스로 걸려들게 두라”고 답했다.
울프는 그러면서 “그가 (당신의) 비행기에 탔다거나 집에 간 적이 없다고 말하면 나중에 그를 공격하거나 그를 구해주며 빚을 지게 만드는 데 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엡스타인은 체포되기 몇 달 전인 2019년 1월 울프에게 보낸 이메일에서는 당시 현직이던 트럼프가 “당연히 그 소녀들(girls)에 대해 알았다”고 말했다. 엡스타인의 성착취 범행 피해자에는 미성년 여성들이 여럿 포함됐는데, ‘소녀들’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엡스타인은 미 역사상 최악의 성 착취범으로 꼽힌다. 2001~2006년 뉴욕 맨해튼, 플로리다주(州) 팜비치 저택에 최소 36명의 미성년자를 동원해 정·재계 주요 인사에 성 접대를 강요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2019년 8월 뉴욕 맨해튼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트럼프 외에도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영국 왕실의 앤드루 왕자 등이 엡스타인과의 친분으로 논란에 휘말렸다.
트럼프는 즉각 트루스소셜을 통해 “민주당이 정부 셧다운 사태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형편없이 대처했는지 눈 가리기 위해 엡스타인 사기극을 다시 꺼내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아주 나쁘거나 멍청한 공화당원만이 그 함정에 빠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는 또 “민주당은 최근 악의적으로 국가를 폐쇄하는 위험한 행동으로 우리나라에 1조5000억 달러의 손실을 입혔다”며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적었다. 트럼프는 그동안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대해 “아직도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느냐”며 무시해왔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도 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을 중상모략할 가짜 내러티브를 만들기 위해 이메일을 선택적으로 유출했다”고 반박했다.
레빗 대변인은 또 2011년 4월 이메일에서 트럼프와 함께 엡스타인의 집에서 몇 시간을 보낸 것으로 언급된 피해자가 지난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버지니아 주프레라고 밝혔다. 그는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잘못된 일에도 전혀 연루되지 않았으며, 자신과의 제한된 접촉 속에서도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고 강조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